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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Mar 09. 2021

아버지와 여자 화장품

20대 초, 한창 외모에 신경 쓸 그 나이에 나는 거울과 뚝 떨어져 지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면서도 욕실 거울을 보기 싫어 타일을 보며 이를 닦을 만큼 내 얼굴을 싫어했던 나날들. 거울에 비칠 때마다 내 얼굴은 오돌토돌 멍게를 연상시켰다. 지금이야 마스크가 몸의 일부인 듯 모두들 쓰고 다니지만 그 시기에 나는 홀로 한여름에도 천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까칠한 팀원들과 은근히 사람을 무시했던 팀장 밑에서 나는 묵묵히 내 일을 찾아 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의 스트레스를 풀지 못하고 꾸역꾸역 삼킨게 결국 탈이 났다. 이마부터 목까지 덮어버린 화농성 여드름. 표정에 변화를 약간만 주어도 뼛속까지 아픔이 전해져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으니, 그맘때 나는 무표정 못난이 인형이었다.


"얼굴을 머리로 가리고 다니면 여드름이 더 난다니까. 올리고 다녀 올리고~ 답답해 죽겠다."

"..."


식탁에서 엄마가 큰 소리로 잔소리를 할 때면 나는 더 어깨가 안으로 굽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밥만 응시한 체 모래알 같은 밥알을 굴리고 굴렸다. 내 얼굴을 보는 가족들의 한숨이 깊어질 때 즈음 나는 피부과를 찾아 연고를 처방받았지만 딱히 효과는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맘때 첫사랑과 이별도 내 피부에 독이 되었던 게 분명했다. 


- 집이니? 아빠 서재에 서류봉투 좀 가져다줄래?

- 네~ 점심때 가져다 드릴게요.


모처럼 휴일이었던 평일 아침, 집으로 걸려온 아빠의 전화에 나는 주섬주섬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마스크를 쓰긴 했지만 아빠 동료분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였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아빠가 나를 딸이라고 말하기가 부끄럽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더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 아빠 저 회사 건물 아래 있어요.

- 거기 있지 말고 3층으로 올라올래? 아빠도 3층으로 갈게.


아빠 회사는 분명 5층인데 3층으로 오라니... 고개를 올려다보니 화장품 회사의 간판이 또렷하게 비쳤다. '설마...' 하는 마음에 3층이 엘리베이터에 멈추었을 때 아빠는 내 팔을 이끌고 당당하게 화장품 회사 유리문을 열었다.


"제 딸인데... 피부 때문에 고민이 많네요. 얼굴이 많이 아픈가 봐요. 병원에 가도 별 소용이 없고..."

"아이코. 예쁜 얼굴에 얼마나 아플까~ 여기 앉아보세요. 이건 얼굴도 얼굴이지만 몸속도 치료를 해야 될 것 같네요."

"아이가 바를 수 있는 걸로 추천해 주세요."

"다정한 아버님이시네요. 잠시만요."


순식간에 내 앞에는 고가의 화장품들이 하나 둘 나열되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빠와 상담해 주시는 직원을 멀뚱멀뚱 쳐다보다 금액을 보고 화들짝 놀라 아빠의 팔을 쿡쿡 찔렀다. 내 눈빛에 아빠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이셨지만 나는 이 상황을 엄마가 알게 되시면 불통이 어디로 튈지 두려움이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렇게 쓰시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저희가 화장품 말고도 제품도 있는데... 한 달 정도 드시면 확실히 효과를 보실 거예요. 가끔 관리도 받으러 오시고요."

"이 분 말씀 들었지? 퇴근 후 여기 와서 관리도 받고 그래. 엄마한텐 아빠가 이야기할게. 가격은 비밀이다."


쇼핑백 한가득 화장품들이 내 손에 쥐어졌다. 유리문을 나선 아빠는 괜찮다고만 하셨다. 엄마가 화장품을 사 오면 받아오는 견본품을 쓰던 내게 첫 화장품을 아빠가 사주시다니... 그 후로도 아빠는 몇 번이나 여자 화장품을 들고 퇴근하셨다. 그리고 그맘때 즈음 내 방에는 예쁜 화장대가 놓였다. 더 이상 거울을 멀리하지 말라고... 많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자신감을 가지라는 아빠의 마음이 느껴졌다. 


- 네가 엄마를 좀 더 닮았으면 예뻤을 텐데... 얼굴도 키도 날 닮아서 아빠가 미안해 죽겠어. 성형은 못 시켜줘도 피부가 좋아지면 그래도 예뻐질 거야. 우리 딸 힘내. -


아빠를 똑 닮은 날 보며 아빠는 마음이 아프셨을까? 아빠의 사랑 플러스 고가의 화장품의 도움으로 내 울긋불긋한 피부는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 15년이 흐른 지금, 그 후 한 번도 얼굴이 뒤집어 지진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남자 화장품을 골라 아빠에게 선물한다. 그때 사주셨던 화장품처럼 비싸지는 않지만 내가 아빠 곁에 머무는 동안 아빠의 얼굴은 내가 책임지고 싶으니까... 


'아빠~ 나는  다시 태어나도 아빠 딸. 사랑해요.' 오늘도 나는 문자 한 통으로 그날의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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