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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Mar 18. 2021

우리의 재회를 꿈꾼다.

"36번. 교과서 5페이지 읽어봐."


중학교 1학년 생활을 시작하는 첫날, 창문 밖은 아직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하지만 교내 화단에는 생명의 기운이 약동했다. '노랗고 하얀 팬지는 누가 심어놨을까?' 운동장을  맴돌던 내 시선이 꽃에 가닿았다. 그때 교실 앞문이 -드르륵- 하고 열렸다. 처음 만난 국어 선생님은 교탁에 오르기도 전에 36번을 큰소리로 부르셨다. '36번이 누구지?'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선생님을 올려다보았다. 40대 후반에 마른 체격,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눈, 유난히 튀어나온 광대뼈 그늘이 그녀의 인상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고 있었다. 


- 야~ 36번 너잖아.- 


짝꿍 은옥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깜짝 놀라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나는 새 교과서를 펴느라 허둥댔다. '첫날이니까 잘 읽어야 해'라는 내 다짐과 다르게 입 밖으로 나오는 단어들은 심하게 흔들렸다. 까만 문자들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러다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내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뒤에서 키득키득 거리는 남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내 목소리를 집어삼켰다. 듣다 못한 은옥이 나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따라 읽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보기 좋게 짜그라졌다.


"그만. 거기까지." 


- 야~ 너 왜 그렇게 떨어...

- 나 난독증이야... 은옥이 슬쩍 내민 쪽지에 나는 '난독증'이라는 치부를 떨리는 손으로 꾹꾹 눌러 적었다. 얼굴이 빨개진 내가 안쓰러웠는지 은옥은 그 후로 아무 말이 없었다. 


"점심 같이 먹자~ 음~ 너 언제부터 그런 거야? 국민학교 때도 그랬어?"

"응~ 내용은 이해가 되는데 읽을 때만  좀 더듬거려. 글자가 이상하게 보여"

"병원 가봐야 하는 건 아니고? 그런데 네가 난독증 인건 어떻게 알아?"

"그냥 6학년 때 친구들이 내가 책 읽는 것 보고 '난독증'이라고 알려줬어. 국어 선생님께서 오늘처럼 내 번호를 부르진 않으시겠지?"

"좀 특이한 분 같긴 하더라. 그런데 넌 뭘 좋아해?"

"나는 ..."


은옥이 싸온 계란말이를 오물거리며 우리는 금세 국어선생님은 잊고 환담을 나누었다. 나는 은옥의 수수하고 밝은 모습이 썩 마음에 들었다. 왠지 우리는 절친이 될 것만 같은 느낌적 느낌랄까.


이틀 후, 다시 돌아온 국어 시간.


"36번 이어지는 내용 읽어봐."


' 맙소사~ 말도 안 돼. 왜  또 나야?' 선생님의 지목에 새파랗게 질린 나를 보며 은옥도 적잖게 놀란 듯 동그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은옥은 내가 더듬거릴 때마다 단어들을 꼭꼭 짚어주었다. 다행히 첫 국어시간만큼 최악은 아니었다. 


"어떻게 36번을 또 들어오면서 부를 수가 있어? 오늘 6일도 아니고 아니 6일이라고 해도 6번부터 시키지 왜?"

"예감이 안 좋아. 계속 그러실 것 같아. 은옥아 나 어쩌면 좋지?"

"그러게...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러지 말고 네가 수업 시간에 읽을 내용을 통으로 외워보는 건 어때?"

"이걸 외우라고? 이게 가능해?"

"대충이라도 내용을 알고 있으면 읽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내가 도와줄게"


하교 후 우리는 시험문제를 외우듯 집으로 걸어가며 국어 교과서를 읊어내려갔다. 잘 읽지 못하는 내게 은옥은 항상 먼저 교과서를 펴 읽어주고 따라 읽도록 잘 할 수 있다고 힘을 주었다. 우리의 예상대로 국어선생님은 늘 '36번'을 외치셨다. 노처녀였던 선생님께 36이라는 숫자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미스터리 한 그녀가 싫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개월이 지나고 3개월이 지나고 6개월이 지날 무렵, 내 입 밖으로 나오던 글자들이 조금씩 제 자리를 찾아 줄을 섰다. 이제  학기 초보다 훨씬 수월하게 책을 낭독할 수 있었다. 모두 은옥의 노력 덕분이었다.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1학년 생활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나는 전학을 가야만 했고 우리는 눈물로 이별을 맞았다.  이사를 가자마자 은옥의 주소로 편지를 보내었지만 1년 동안 빈 우편함은 딱딱한 고지서만 토해냈다. 그동안 나는 때때로 은옥을 꿈에서 만났다. 그때마다 은옥은 '꼭 편지할게'라며 거듭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꿈에서 깨면 나는 은옥이 없는 교실 안에 홀로 앉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왜 답이 없는 건지... 내가 보낸 편지가 분실되었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아니 혹시 무슨 사고가 있었던 건 아닐까?' 은옥을 떠올릴 때마다 그리움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 나가기를 반복했다. 이미 3번의 전학을 다녔던 내게는 익숙한 친구들과의 이별이었지만 유독 은옥과의 이별은 견디기 어려웠다. 그맘때 나는 사춘기라는 생의 첫 비바람을 맡고 있었으니까...


뜨거웠던 여름 날, 하교 후 우편함에 은옥의 이름이 적힌 편지 봉투를 받고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하지만 내 반가움과 떨림은 편지를 읽으며 무너졌다. 은옥의 편지는 짧고 간결했다. 그 오랜 기다림이 무색할 정도였다. 내가 이사를 하고 난 뒤, 은옥도 타지로 터를 옮겼다 했다. 외할머니 댁을 방문하면서 혹시나 내 편지가 있을까 봐 살던 집에 가서 편지를 받았노라고... 열통 정도의 편지를 은옥은 받았다고 적혀있었다. 분실된 편지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은옥은 부모님과 살고 있지 않고 오빠와 함께 고모님 댁에서 살고 있다고했다. 왜 봉투에는 이사한 집의 주소가 아닌 예전 주소가 그대로 적혀있었을까? 몇 번이고 편지를 읽고 또 읽었지만 예전에 은옥에서 느껴지던 밝음과 따뜻함은 찾기 어려웠다.


아직도 편지의 마지막 맺음말을 기억하고 있다. 잘 지내고 건강하라고... 나중에 만나면 좋겠다는 기약 없는 약속. 그 약속은 서로의 눈빛을 마주하고 했던 말보다 더 서글픈 것이었다. 한동안 나는 은옥의 편지를 안고 살았다. 혹시 몰라 예전에 보냈던 주소로 편지를 보내었지만 답장을 받지 못하였다. 은옥에 대한 그리움은 화석처럼 시간의 흐름에 조금씩 퇴적되어갔다. 


작년 크리스마스이브에 갑작스러운 이별을 고했던 친구의 일을 겪었을 때, 나는 은옥을 떠올렸다. 한동안 멘붕 상태에서 혼자 있는 시간은 무척 고통스러웠다. 그러다 문득 삶에서 어쩔 수 없는 이별이 있다는 것을 나는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친한 사이더라도 말 못 할 사정은 존재할 테니까~ 나는 억지로 '이해한다'라는 단어를 뇌 속에서 끄집어 내었다. 그리고 그 말이 가슴에 닿을 때까지는 무작정 기다리기로 했다.


여전히 나는 은옥이 그립고 작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이별을 통보한 친구가 그립다. 어디에서인가 그 벗들도 나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갈매기의 꿈>의 저자인 리처드 바크는 이렇게 말했다. "작별 인사에 낙담하지 말라. 재회에 앞서 작별은 필요하다. 그리고 친구라면 잠시 혹은 오랜 뒤라도 꼭 재회하게 될 터이니." 세월의 흔적이 얼굴에 고스란히 묻어있을 우리의 재회가 아름다울 수 있도록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나는 오늘도 우리의 재회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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