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agancia Mar 24. 2021

9년 동안 쓴 육아일기 30권.

매일 한 번은 최후를 생각할 것. - 이병률

깊은 밤. 컴퓨터를 켜고 바탕화면에 오래 머문 "사진" 폴더를 더블클릭했다. 40,000여 개의 사진 파일이 월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90프로 이상 아이의 성장과정을 담은 사진이었지만 그중에는 왜 저장해 놓았는지 모를 풍경과 필사 노트, 작은 메모지도 보였다. 하나하나 큰 화면으로 넘기기에 양도 많았고 매일 할 일도 많아 슬쩍 모른 척 미뤄놓는 게 차라리 자연스러웠지만 작은 폴더들 사이에서 '나'라는 사람이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웃겨 그대로 두긴 두었다. 


매일 잠들기 전 하루를 정리하며 내가 하는 일, 그것은 육아일기를 쓰는 것. 작년에는 전염병으로 그날이 그날 같은 시간을 보낸 터라 길게 쓰지 못하였지만 사진 한두 장의 편집하여 첨부했다. 사계절이 흐르는 동안 아이의 성장이 눈에 확 들어왔다. 봄에 입혔던 옷이 가을엔 작아져 있었고, 봄에 빠진 앞니는 자라나 더 이상 입을 가리지 않고 웃을 수 있게 되었다. 활동적인 아이라 흔들린 사진도 있었다. 완벽하지 않는 사진들이 웃기기 마련일 터인데, 이조차 인생이라는 보온병 안에 쌓이고 쌓인 것만 같다.


초여름 외할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에 가 열심히 왼손을 마사지 한 모습, 마스크를 쓰고 뒷산에 다녔던 기억, 며칠 가지는 못했지만 새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던 모습. 그랬다. 나는 1년 동안 아이를 찍고 기록하며 하루하루를 산 시절이 있었다. 문득 시간의 흐름 앞에 훌쩍 커버린 아이의 성장이 아쉬워 쓸쓸해지는 밤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둘째 아이를 출산하러 가기 전 연락했던 친구.  의학이 발달해도 출산 과정에서 과다 출혈로 둘째 아이를 안아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았던 그 엄마. 먹먹한 마음에 장례식장으로 향하던 내 발걸음 위로 "매일 한 번은 죽음은 생각해 보자."라는 다짐이 먼지처럼 쌓였었다.


아무리 아이에게 관심과 사랑을 주고 싶어도 오늘이 나의 최후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아이와 눈을 마주하고 손을 잡을 수 있는 이 시간에 감사하며 매일을 적어가고 있다. 아이를 위해 쓰는 이 글이 나를 엄마로 변하게 했을 것이고 흰 모니터 속 커서의 깜빡거리는 횟수만큼이나 '너를 사랑해'라는 몸짓이라 믿었으니까...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나는 모나고 거칠고 투박했으나 내 삶을 뚫고 나온 한 아이의 인생은 나보다는 부드럽고 맨들 거리며 찬란하게 자라길 간절히 바란다.


며칠 동안 일기들을 편집해 정리하니 32번째 일기장이 만들어졌다. 아이는 이제 어린 시절의 일기장을 꺼내어 사진을 보고 과거의 자기의 하루를 읽어 내려간다. 가슴 벅찬 일이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이의 성장을 기록하고, 엄마로 좋은 행동을 통해 본을 보이고, 늘 감사하며, 매일 한 번 최후를 생각하는 것. 이 모든 결심들이 4만 장의 사진 속에서도 수도 없이 내뱉고, 되뇌곤 했던 중얼거림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하루에 세 번 크게 숨을 쉴 것, 
맑은 강과 큰 산이 있다는 곳을 향해 머리를 둘 것, 
머리를 두고 누워 좋은 결심을 떠올려볼 것, 
시간이 묵직한 테가 이마에 얹힐 때까지 
해질 때까지 매일 한 번은 최후를 생각해둘 것. 
혼자가 혼자에게 - 이병률 (가벼운 금언 中 - 이상희)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의 재회를 꿈꾼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