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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Mar 25. 2021

작가의 글을 맛보는 일 -책 필사

<무진기행> 필사를 마치며...

읽어보지 못한 책을 내 손에 들고 있으면 발끝에서부터 전율을 일어난다. 특히 많은 이들의 추천을 받은 책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번에 필사한 책은 김승옥 작가의 단편 <무진기행>. '196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 '감수성의 혁명을 일으킨 작가'라는 평을 받는 그의 글을 파헤쳐 보고 싶었다. 필사를 마칠 때까지 14일이 걸렸다.


단편소설이라 줄거리를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작가는 무진이라는 상상 속의 도시로 나를 끌어당겼다. 아마 자신의 고향 순천을 모티브로 무진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이상과 현실 속의 갈등, 어른이 되기 전에 거치는 성인식, 혼란스럽고 쓸쓸하고 때로는 소름 끼치는 작가의 감정들이 필사 마지막까지 나를 따라붙었다.


마지막 문장을 쓰고 펜의 뚜껑을 닫으면서 이런 수려한 문장들을 23살 청년이 써 내려갔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적으면서 생겼던 수많은 물음표에 답을 줄 차례였다. 작품평을 찾아 읽고 필사 노트에서 밑줄을 그었던 부분을 다시 읽었을 때에야 비로소 무진의 안개가 내 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나는 왜 필사를 시작했을까? 그리고 왜 필사의 늪에 빠지게 되었을까?

내 인생에 필사가 처음 자리 잡은 것은 바로 19년도 5월이었다. 그때는 하루 한 문장을 필사했다. 주어지는 문장 아래에 내 생각을 적기도 하고 왜 작가가 이 문장을 남겼는지 찾아보았다. 봄, 여름 가을을 지나 겨울이 찬바람을 몰고 왔을 때, 나는 이렇게 외쳤다. '글을 써야겠다고...' 그리고 본격적으로 20년 1월부터 글을 써 내려갔다.


바쁜 일상이었지만 필사는 놓을 수가 없었다. 그때는 그저 하얀 노트에 가득 수놓아지는 글자들의 배열이 맘에 들었으니까... 그뿐이었다. 1년이 흐른 지금 내가 왜 필사를 하고 있는지가 명확해졌다. 작가에게 독서가 음식을 입으로 넣는 행위라면 필사는 오물오물 씹으며 맛을 음미하는 것과 같다. 식사를 할 때 주위가 어수선하면 그 맛을 온전히 음미할 수 없는 것처럼 필사하는 시간 역시 그렇다. 해가 뜨기 전 스탠드 불빛에서 의지해 필사를 하다 보면 작가와 내가 동시대에 살고 있는 착각에 빠져든다. 마치 내가 무진의 그 안갯속 한가운데 서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무진기행 필사를 마치자마자 새로운 책을 잡았다. 박완서 작가의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이다. 소박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것을 소중하게 여긴 박완서 작가님은 나를 또 어떤 곳으로 이끄실까?


이 글을 통해 - 공대생의 심야 서재의 통 필사 모임 with 친절한 은자 씨- 모임에서 함께 필사를 이어가 주신 은자 씨님 달봄님 플리 님 감사를 전합니다.

14일간의 기록

https://forms.gle/7HwcyZ8sHWybtbdY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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