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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May 12. 2021

무뚝뚝한 남편이 나를 위로하는 방법.

하루를 소중하게 최선을 다하라고...

남편이 출근을 하고 아이가 등교를 하면 온전히 나 혼자만의 시간이 찾아온다. 기다려지기도 하지만 내게는 두려워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평소에 이런 시간이 오면 독서, 글쓰기, 음악 듣기 혹은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혼자 있으면 암막 커튼을 치고 침대에 멍하게 누워 흐릿하게 보이는 시계를 바라보다 눈물을 흘린다. 물론 며칠째 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제주에 다녀온 이후로 자꾸 이모와 외할머니의 모습이 눈만 감으면 떠오른다. 4개월 동안 이모는 20년을 보낸 사람처럼 주름과 흰머리가 가득했다.  40킬로도 되지 않는 몸을 나를 보자 겨우 일으켜 세웠다. 그러면서도 활짝 웃어 보였다. 살아야겠다고 꼭 살 거라고 말하는 이모가 병을 정복한 영웅처럼 느껴졌다. 나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하지만 모두가 잠든 저녁 작은방에서 홀로 무릎을 꿇고 막내딸을 위해 기도하는 외할머니를 보면서 눈물을 훔쳐야 했다. 세상에 가장 큰 불효는 부모보다 먼저 죽음을 준비하는 자식을 볼 때가 아닐까? 가엽고 가여운 할머니의 작은 등에서 나는 절망을 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마주하는 동안 우리는 웃고 또 웃었다. 눈물은 오히려 눈앞에 당사자가 보이지 않을 때 터져 나왔다. 집에 돌아와 홀로 있는 시간이면 나는 무너지고 또 무너졌다. 우는 여자를 가장 싫어하는 남편 앞에서 자존심이 상해 꾸역꾸역 참았지만 퉁퉁 부은 눈은 숨길 수가 없었다. 내가 슬퍼한다고 남편이 위로를 해주는 사람은 아니다. 무뚝뚝한 남편은 단지 나를 측은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오늘은 가족들이 집을 비우고 나 역시 병원에 갔다가 집에 들어오기 전 공원에 들렀다. 잠시 우울한 기분을 벗어버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때였다. 남편의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평소 단답형인 사람이 보낸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긴 문자였다.


- 뭐예요?

- 읽어보라고...


눈이 부셔 읽기 불편했던 나는 그늘이 진 다른 벤치에 앉아 남편이 보낸 톡을 읽어 내려갔다.


영국에 살던 두 아이의 엄마 "샬롯 키틀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36세. 대장암 4기 진단 후 간과 폐에 전이되어 25회 방사선 치료와 39번의 화학 요법 치료도 견뎌냈지만 끝내 숨지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블로그에 남겨진 마지막 그녀의 글 중에는 


"살고 싶은 나날이 이리 많은데... 저한테 허락하지 않네요. 내 아이들 커가는 모습도 보고 싶고 남편에게 못된 마누라도 되면서 늙어보고 싶은데, 그럴 시간을 안 주네요. 살아보니 그렇더라고요. 매일 아침 아이들에게 일어나라고, 서두르라고, 이 닦으라고 소리소리 지르는 나날이 행복이었더군요. 


살고 싶어서... 해보라는 온갖 치료를 다 받아봤어요. 기본적 의학 요법은 물론, 기름에 절인 치즈도 먹어보고 쓰디쓴 즙도 마셔봤습니다.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귀한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손으로 장례식 문제를 미리 처리해 놓고 나니, 매일 아침 일어나 내 아이들 껴안아 주고 뽀뽀해 줄 수 있다는 게 새삼 정말 감사하게 느껴졌어요.


얼마 후 나는 그이의 곁에서 잠을 깨는 기쁨을 잃게 될 것이고 그이는 무심코 커피잔 두 개를 꺼냈다가 커피는 한 잔만 타도된다는 사실에 슬퍼하겠지요. 딸아이 머리 땋아줘야 하는데... 아들 녀석 잃어버린 레고의 어느 조각이 어디에 굴러 들어가 있는지는 저만 아는데... 그건 누가 찾아줄까요...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고 22개월 살았습니다.


그렇게 1년 보너스로 얻은 덕에 초등학교 입학 첫날 학교에 데려다주는 기쁨을 품고 갈 수 있게 됐습니다. 녀석의 첫 번째 흔들거리던 이빨이 빠져 그 기념으로 자전거를 사주러 갔을 때는 정말 행복했어요. 보너스 1년 덕분에 30년 중반이 아니라 30대 후반까지 살고 가네요. 중년의 복부 비만이오? 늘어나는 허리둘레 그거 한번 가져봤으면 좋겠습니다. 희어지는 머리카락이오? 그거 한번 뽑아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만큼 살아남는다는 얘기잖아요. 저는 한번 늙어보고 싶어요. 부디 삶을 즐기면서 사세요. 두 손으로 삶을 꼭 붙드세요. 여러분들이 부럽습니다. "


우리는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생활하니깐요. 오늘은 어제의 누군가가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하루입니다. 주어진 이 소중한 "하루"를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게 바로 사랑이고 행복입니다.

- 눈물이 나도록 살아라 中


나는 두 번 더 남편이 보내준 문자를 읽어보았다. 소리 없이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닦아내며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이모를 만났을 때 이모는 습관처럼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고마워. 이 시간에 감사해.' 그리고 너무 아픈 통증이 왔을 때 잘 나온 사진들 사이에서 영정사진을 고르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남겼다는 이야기도 나누었다. 나는 마냥 그 이야기들이 슬프기만 했지만 이모도 지금의 시간을 보너스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을까?


나 못지않게 남편도 막내 이모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남편을 조카사위라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정이 간다며 안아주었던 이모. 늘 만나면 좋은 걸 보여주고 먹이기 위해 먼 곳까지 달려가던 이모. 문제가 생기면 기꺼이 상담사 역할을 해주던 이모가 암이 재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남편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는 표현을 내게 했었다. 나는 내 아픔만 크게 생각했지 남편의 아픔에는 무감각했다. 이 내용을 검색하고 내게 문자로 보내기까지 남편은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코끝이 찡해졌다. 


깜깜한 방에서 그만 울고 주어진 하루를 소중하게 보내라고, 이 시간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는 게 이모에 대한 예의이자 사랑이자 행복이라고... 힘든 나를 위로하는 남편만의 위로 방식에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지금 당장 슬픔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보너스처럼 주어진 시간에 감사하는 것. 두 손으로 삶을 꼭 붙잡고 있는 이모가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오늘도 나는 이모에게 편지를 쓴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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