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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May 25. 2021

샤스타 데이지가 활짝 피었습니다.

변산 마실길

지난 주말, 남편은 욕실에서 톡 하나를 보내왔다. '아니 거실로 나와서 이야기하면 되지.'라고 생각하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누군가가 올린 블로그 링크와 함께 글 아래에는 남편이 보낸 텍스트 하나가 적혀 있었다.

 

- 자기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바람이라도 쐬자. 나 어차피 근처로 일 보러 가야 해.


마음 같아서는 혼자 방에 콩 박혀 있고 싶었지만, 표현력이 약한 남편이 이렇게 권하는데 거절할 수는 없었다. 가볍게 화장을 좀 해보려고 화장대 거울을 본 순간, '너는 누구냐' 퉁퉁 부은 것도 모자라 충혈된 눈, 축 늘어진 입꼬리 하며 모르는 사람이 나를 보면 분명 '우환이 있어'라고 생각할게 뻔한 얼굴빛이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릴 수 있음에 감사했다.


대충 챙겨 아이와 함께 변산반도로 출발.

마실길 초입부터 차들로 북적여 오르기 꺼려졌지만 막상 언덕을 올라가서 본 풍경에 나는 금세 매료되었다. 멀리서 들리는 새소리와 파도소리에 맞춰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꽃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감탄사가 뿜어져 나왔다. 천천히 걸어가면서 깊게 심호흡을 하니 강하지 않은 꽃향기가 코를 파고들었다.


"우와~ 이렇게 많은 꽃들 처음 봐요. 계란꽃 계란꽃! 여기서 사진 찍어주세요."

"여기 잠깐 서봐."


오랜만에 나는 폰으로 아이와 꽃들을 담았다. 그러고 보니 매일 아이를 찍었는데 요즘 이모 일로 찍지 못했다는 걸 폰 갤러리를 확인하고 서야 알 수 있었다. 꽃을 보며 웃는 내 얼굴이 예뻐 보였는지 '엄마가 웃는 게 좋아'라며 내 볼에 자기 손을 가져간 아들. 미안함에 가슴이 저렸다.  

두 번째 언덕을 오르자 꽃들 사이로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잠시 멈춰서 작은 벤치에 앉아 수평선이 보이는 곳을 바라보았다. 순간 내 눈에서는 또 수도꼭지가 터졌다. 어린 시절 계란꽃이라며 이모와 둘이서 개망초를 따다가 소꿉놀이를 했던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가방에 있는 손수건을 꺼내고 있을 때 남편이 내 옆자리에 앉았다.


"울지 마. 자기가 슬퍼하는걸 이모님은 원치 않을 거야. 여기 있다가 더 심란해지는 거 아니지?"

"이모도 꽃 바라기인데 직접 보면 얼마나 좋겠어. 그래도 고마워요. 꽃이랑 바다 보니 좋네."


남편이 이곳으로 나를 데려온 이유를 알고 있었다. 예전에 힘든 일을 마주할 때면 '내가 이토록 힘든데 이렇게 무심할 수 있어' 원망 아닌 원망을 글로 풀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다. 내가 꽃을 좋아하고 바다를 보면 가슴이 확 트일 거라는 걸 남편은 미리 생각했다는 걸... 어느 순간부터 남편의 위로 방법에 나도 익숙해지고 있다는 걸...

언덕에서 내려왔을 때 본 금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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