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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May 29. 2021

편지 - 그리운 벗에게(1)

"36번. 교과서 5페이지 읽어봐."


중학교 1학년 생활이 시작하는 첫날, 창문 밖은 아직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하지만 교내 화단에는 생명의 기운이 약동했다. '노랗고 하얀 팬지는 누가 심어놨을까?' 교정을 맴돌던 내 시선이 꽃에 가닿았다. 그때 교실 앞문이 -드르륵- 하고 열렸다. 처음 학생들과 만난 국어 선생님은 교탁에 오르기도 전에 36번을 큰소리로 부르셨다. '36번이 누구지?'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선생님을 올려다보았다. 40대 후반에 마른 체격,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눈, 유난히 튀어나온 광대뼈가 그녀의 인상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 야~ 36번 너잖아.- 


짝꿍 은옥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깜짝 놀라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나는 새 교과서를 펴느라 허둥댔다. '첫날이니까 잘 읽어야 해'라는 내 다짐과 다르게 입 밖으로 나오는 단어들은 심하게 흔들렸다. 까만 문자들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러다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내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뒷자리에서 키득키득 거리는 남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내 목소리를 집어삼켰다. 듣다 못한 은옥이 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단어들을 따라 읽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마침표까지 읽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보기 좋게 짜그라졌다.


"그만. 거기까지." 


- 야~ 너 왜 그렇게 떨어?

- 나 난독증이야.


은옥이 슬쩍 내민 쪽지에 나는 '난독증'이라는 치부를 떨리는 손으로 적었다. 얼굴이 빨개진 내가 안쓰러웠는지 은옥은 그 후로 아무 말이 없었다. 


"점심 같이 먹자. 너 언제부터 그런 거야? 국민학교 때도 그랬어?"

"응. 내용은 이해가 되는데 읽을 때 글씨가 이상하게 보여. 그래서 더듬거리는 거야."

"병원 가봤고? 네가 난독증 인건 어떻게 알아?"

"친구들이 내가 책 읽는 것 보고 '난독증'이라고 알려줬어. 설마 국어 선생님께서 오늘처럼 오시자마자 내 번호를 부르진 않으시겠지?"

"좀 특이한 분 같긴 하더라. 그런데 넌 뭘 좋아해?"

"나는......"


내가 싸온 계란말이를 오물거리며 우리는 금세 국어 선생님은 잊고 환담을 나누었다. 나는 은옥의 수수한 모습이 썩 마음에 들었다. 하교하는 길에도 우리의 대화는 이어졌다. 왠지 은옥과 나는 절친이 될 것만 같은 느낌적 느낌이 들었다. 


이틀 후, 다시 돌아온 국어 시간.


"36번 이어지는 내용 읽어봐."


'말도 안 돼. 또 나야?' 선생님의 지목에 새파랗게 질린 나를 보며 은옥도 적잖게 놀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더듬거릴 때마다 전처럼 단어들을 꼭꼭 짚어주었다. 다행히 첫 국어시간만큼 최악은 아니었다. 


"어떻게 36번을 또 들어오면서 부를 수가 있어? 오늘 6일도 아니고 아니!! 6일이라고 해도 6번부터 시키지 왜?"

"예감이 안 좋아. 계속 그러실 것 같아. 나 어쩌면 좋지?"

"그러게...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러지 말고 네가 수업 시간에 읽을 내용을 통으로 외워봐. 어때?"

"이걸 외우라고? 불가능이야. 불가능"

"계속 읽다 보면 익숙해지지 않겠어? 내가 도와줄게"


하교 후, 우리는 시험문제를 외우듯 집으로 걸어가며 국어 교과서를 읊어내려 갔다. 우리의 예상대로 국어 선생님은 늘 '36번'을 외치셨다. 노처녀였던 선생님은 36이라는 숫자와 무슨 연관이 있으신 걸까? 미스터리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소름이 돋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6개월이 지날 무렵, 내 입 밖으로 나오던 글자들이 조금씩 제 자리를 찾아 줄을 섰다. 이제 외우려 하지 않아도 학기 초보다 훨씬 수월하게 글자들을 읽을 수 있었다. 이 모두 은옥의 노력 덕분이었다.


늦가을, 체 1년을 친구와 보내기도 전에 나는 전학을 가야만 했다. 


"편지할 거지?"

"당연하지 편지 꼭 할 거야." 우리는 눈물로 이별을 맞았다. 이사를 하자마자 은옥에게 편지를 보내었다. 몇 번의 편지를 보내는 동안에도 은옥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1년 가까이 돈절되었던 은옥에게서 뜻밖에 편지가 도착했다. 


- 다음 편에 계속 -


가닿다 [동사] 관심 따위가 어떤 대상에 이르러 미치다.

돈절하다 (頓絕 하다) [동사] 편지나 소식 따위가 딱 끊어지다. 

약동하다 (躍動 하다) [동사] 생기 있고 활발하게 움직이다. 

환담하다 (歡談 하다) [동사] 정답고 즐겁게 서로 이야기하다. 

짜그라지다 짓눌려서 여기저기 고르지 아니하게 오그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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