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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Jun 16. 2021

음식을 대하는 자세.

'카레는 국 아닌가요?' 어릴 때 엄마가 가족을 위해 끓여 주시던 카레 국.

미안한 말이지만 엄마는 요리를 못한다. 지금 생각해 보건대 그건 아빠가 영향이 가장 컸던 것 같다. 뭐든 손을 쓰는 일을 잘하셨던 아빠는 ' 뚝딱뚝딱 짜잔' 하면 선반이, 책상이, 의자를 마법처럼 탄생시키셨다. 심지어 미싱도 하셨는데 동생과 내 옷을 직접 리폼해 주시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기와 만들기 숙제를 받아오면 아빠는 도저히 국민학생이 만들 수 없는 작품을 만들어 친구들과 선생님을 당황하게 만드셨다.


손재주가 좋으신 아빠가 대단해 보였지만 가장 멋진 순간은 따로 있었다. 엄마의 정체 모를 요리가 짠맛과 단맛의 향이어도 묵묵히 맛있다고 먹어주는 아빠를 보면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 표현이었다고... 아빠의 "인내" 덕분에 엄마의 요리 실력은 좀처럼 늘지 않았고 학창 시절 동안 카레를 국으로 알고 먹어야 하는 웃픈 상황이 지속되었다.



내가 8살 때로 기억한다. 찌는 듯한 여름날, 나는 처음으로 압력밥솥에 밥을 했다. 그날따라 부모님은 늦게 퇴근하셨고 6살 동생은 배가 고프다며 징징거렸다. 얼마나 쌀을 넣어야 어느 정도의 밥이 되는지 몰랐던 터라 엄마가 평소 하는 대로 그릇에 쌀을 3번 퍼서 조막만 한 손으로 휘리릭 씻어 밥을 지었다.


압력밥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릴 때 돌아오신 부모님은 내가 밥을 했다는 사실보다 위험한 가스불을 썼다는 것에 놀라셨고 바로 등짝 스매싱이 날아왔다. 다시는 밥을 안 해야겠다고 굳게 다짐했지만 그날 내가 했던 밥은 엄마가 했던 밥보다 훨씬 맛이 좋았다. 뽀얗게 입은 밥알이 적당히 익어 나의 재능을 발견했던 순간이었다. "딸 엄마 지금 퇴근하니까 밥 좀 해놔...." 나는 콩쥐가 아닌데... 친구들은 엄마가 "딸은 나처럼 일찍 고생하는 거 싫다."라며 주방에 오는 것도 막았다고 하는데... 역시 다른 엄마들과는 양육 방식이 달랐던 엄마는 나를 강하게 키우셨던 게 분명했다.




고등학교 1학년. 방과 후 가정 선생님께서 "한식조리사 자격증"반을 만들어 보고 싶다고 하셨다. 재료비는 10만 원... 학용품 외에 용돈을 거의 받아본 적이 없었던 내게는 큰돈이었기에 당연히 하지 말라는 말을 기대하며 엄마에게 말씀드렸다.


"엄마 학교에서 한식조리사 자격증반이 생긴다네."

"너 그거 해. 엄마가 10만 원 내일 줄게."


괜히 말했다. 엄마의 닦달에 필기를 한 번에 붙었다. 그 당시 55가지 한식을 학교와 집에서 실습하면서 저녁시간마다 '오늘은 무슨 요리가 나오냐'라며 가족들에게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첫 실기 시험은 한 시간 동안 두 가지 음식을 만들기. 그때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른다. "무생채"와 "만둣국" 시험장에는 17살 여고생 10명뿐 아니라 어른들도 많았다. 시험 감독관을 보며 손을 달달 떨었던 나는 서툰 칼질에 손가락을 쓰윽 포를 떠 버렸다. 도마에 피가 뚝뚝 결과는 "불합격"


"엄마 이제 안 할래요 한번 배웠으니까 된 거지." 포기 선언에도 엄마는 다음 실기 시험비를 내 손에 쥐어주셨다. 두 번째 실기시험을 보기 바로 전날 연습을 한다고 칼을 갈고 대파를 손질하는 그 순간, 너무 칼을 잘 갈았나 보다. 왼쪽 두 번째 손가락 손톱 반을 썰어버리는 참상을 낳았다. 떨어져 나간 손톱과 살점을 보며 아픔보다 다음 날 시험이 더 걱정이었고 시험보다 엄마의 불호령이 더 무서웠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약국에서 골무를 구입해 손가락에 끼우고서 두 번째 시험 실기를 보러 갔다. -너비아니와 나박김치- 감독관이 내 손을 빤히 쳐다보더니만 "삔 거예요?"라고 물었다. 나는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2차 시험 결과는 "합격"


나보다 뛸 듯이 더 좋아했던 엄마의 눈빛은 빛났다. 그 후로 점점 엄마의 구역은 거실로 내 구역은 주방으로 옮겨져 갔다. 솔직히 말해 요리가 내 적성에 맞는 건 아니었다. 가족들이 식사를 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만들었던 적도 많았다. 가족들은 맛있게 먹는데 나는 식재료를 익히고 볶으면서 냄새에 질려 식욕이 뚝 떨어졌다. 그래서 더 요리가 즐겁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결혼하고서도 요리에 대한 생각은 그리 크게 바뀌지 않았다. 살기 위해 먹는 거지 먹기 위해 사는 건 아니었으니까.




한 권의 책을 읽고 내 마음가짐은 바뀌었다.


밥을 하는 손에 어떤 바람을 담고 있나요?

아이 밥을 만들 때는 '다른 사람에 도움이 되는 아이로 자라기를' 어른 밥을 만들 때는 '오늘 하루 활기차게 보낼 수 있기를' 저는 오랫동안 이러한 마음으로 요리를 해 왔습니다.

나름의 철칙인 셈이죠. 오로지 가장 소중한 바람만을 음식에 부탁하며 음식을 먹는 사람이 생명의 힘을 얻도록 합니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의 마음과 에너지는 그 사람의 손을 통해 음식에 담깁니다. 사랑하는 마음뿐만 아니라, 화가 나서 만들면 요리한 사람의 분노의 에너지가 음식에 담기게 되어 그 음식을 먹는 사람에게 영향을 주게 됩니다.

소중한 것은 모두 키친에서 배웠어. -  히야마 다미



가족들에게 정성을 먹이는 일임에도 나는 '오늘 저녁은 뭘 해야 하나' 걱정 한가득을 음식에 녹이고 있었다. 남편에게도 아이에게도 미안해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 더욱 맛있게, 평온한 마음으로... 소중하게... 요리가 이런 행복감을 주는 것이었구나.' 음식을 만드는 나의 태도는 점점 바뀌어 가고 있었다.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것 나쁜 것을 몸에 들이지 않는 것과 함께 내가 만든 한 끼 식사가 소중한 생명을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을 늘 상기시켰다. 지금은 이 점을 꼭 기억하며 음식을 만들어 나갔다.


주방 입성 30년 차, 어떤 음식을 맛보면 비슷하게 흉내 낼 정도는 된다. 좋은 식재료를 고르는 것부터 기본적인 양념과 정성이 더해지면 맛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니까. 엄마 덕분? 에 시작한 요리는 이제 집안에서 가장 행복한 소리와 냄새가 나는 장소로, 누군가 찾아오면 따뜻한 음식을 대접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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