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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Jun 24. 2022

85세 할머니와 아이패드

마지막 선물.

알람이 울리기 적어도 30분 전, 나는 눈을 감은 채 침대 아래로 손을 뻗었다. 늘 하던 대로 단단한 휴대폰을 얼굴 가까이로 가져와 4개의 숫자를 확인하고 몸을 일으켰다. 무음으로 해둔 전화엔 부재중 전화가 2~3통 반짝반짝. 누구인지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다. 주방으로 들어가 물을 한잔 목으로 넘기며 초록색 통화 버튼을 꾹.


"잘 주무셨어요?"

"이제 일어났냐? 아이고 이건 또 왜 안되는지 모르겄다."

"아이 학교 보내고 제가 갈게요. 조금만 기다리셔요."

"올 때 그릇 하나만 가꼬 온나."

"네."




외할머니께서 집으로 돌아오신지 2달. 추운 겨울 홀로 계시며 건강이 악화될까 봐 큰 이모께서 할머니를 모셔갔다. 꽃 피는 봄이 오면 금방 돌아오실 줄 알았는데 매화꽃이 떨어지고 벚꽃이 펴도 오신다는 말씀이 없으셨다. 그러다 비행기를 타기 하루 전날 집에 오시겠다고 말씀하셔서 엄마와 나는 급하게 할머니 집에 가 쌓인 먼지를 말끔히 털어냈다. 두꺼운 겨울 이불 대신 가벼운 봄 이불을 농에서 꺼내며 엄마는 말씀하셨다.


"얼마나 사시겠니. 계실 때라도 잘 해드려야지. 할머니 너무 안쓰럽고 안쓰러워."


6개월 만에 만난 할머니의 모습에서 엄마의 '안쓰럽다'라는 말씀이 내 가슴을 관통했다. 뼈와 가죽이 딱 달라붙어 쭈욱 늘어난 피부엔 검버섯에 가득 폈다. 온몸을 지탱한 지팡이가 가늘게 떨렸다. 반가움에 뛰어가 할머니를 안았을 때, 떠나버린 이모를 안는 것만 같았다. 뼈와 뼈 사이가 만져져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애써 얼굴을 밝히며 할머니 집으로 들어섰다. 한동안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병원만 다니시던 할머니.


다행히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어 6월은 댁에 계신 시간이 늘었다. 그리고 그 후부터 자주 나를 찾으셨다. 그 이유는 하나. 바로 '아이패드'. 

처음에 할머니께서 낡은 가방 안을 열고 아이패드를 꺼냈을 때 의아했다.


"이것 좀 가르쳐줘봐."

"할머니 이거 쓰시게요? 어렵진 않아요. 휴대폰이랑 똑같아요. 이렇게 손으로 밀면..."


패드 배경화면에는 아이콘이 정신없이 배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콘 너머에는 눈부시게 웃고 있는 이모와 이모가 키우던 고양이의 사진이 나타났다.


"이 패드..."

"막내 거여. 막내가 나 쓰라고..."


왜 이모가 이 패드를 할머니에게 남겼을까. 여든다섯 할머니께서 패드를 어떻게 사용하시라고... 갤러리를 터치했다. 그곳엔 이모가 건강했을 때 떠났던 가족여행, 할머니와 걸었던 올레길, 강아지와 고양이들과 함께 찍은 동영상, 그리고 이모의 마지막 인사. 깊게 가라앉아 있었던 그리움이 한꺼번에 눈물로 터져 나왔다.


나는 이모가 떠나고 자주 폰에서 이모 사진을 꺼내보지만 패드에서 보는 이모의 모습은 또 달라 보였다. 마치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소리와 몸짓, 눈이 빨개진 내 곁에서 할머니께서도 눈물을 훔치셨다. 이모의 손길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패드를 손바닥으로 쓸며 말없이 이모 사진을 처음부터 끝까지 넘겼다.


"할머니, 이모가 할머니께 꼭 드리고 싶었나 봐요. 이걸루 이모 사진이랑 동영상도 보실 수 있고, 여기 앱에 들어가면 글도 보실 수 있어요. 그리고 여긴 다른 영상도 있고요. 어려우면 제가 도와드릴게요."


처음엔 이걸 어찌 사용하나 답답하셨나 보다. 하지만 몇 번 반복해서 알려드리니 이젠 다른 앱도 척척 들어가신다. 물론 젊은 사람보다 시간이 걸리고 떨리는 손 때문에 화면이 휘리릭 사라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치유는 아주 소박한 것입니다. 사람 마음을 어떤 순간에 살짝 만지는 것, 별것 아닌데 사람이 휘청하는 것, 그냥 울컥하는 것, 기우뚱하는 어떤 순간, 그것이 바로 치유의 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치유자가 될 수 있어요. 더구나 지금과 같은 때는 더 그렇죠.
-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정혜신, 진은영>



할머니의 가슴속에 마르지 않는 우물이 생겼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과 그리움이 차오를 때마다 곁에 있는 가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하지만 치유의 순간은 오히려 소박한 것들에서 찾아온다. 어쩌면 이모는 그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슬픔을 꽁꽁 숨겨두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순간들을 떠올릴 수 있도록 말이다. 그 추억들이 하루하루를 버틸 힘을 줄 거라고, 보고 싶을 때 눈물을 흘려도 괜찮다고, 힘내라고...


오늘 아침, 현관문에 들어섰을 때, 여든다섯 할머니께서 아이패드 속 딸의 모습을 조용히 가슴에 담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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