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했던 시절에 대하여.
소슬바람이 추수가 끝난 들녘을 타고 마당을 넘나들었다. 저녁 무렵 동생과 나는 평상에 앉아 공기놀이를 하며 부모님을 기다렸다. 삐걱 열리는 대문 소리에 우리는 얼른 슬리퍼를 신었다. 엄마의 붉게 튀어나온 오른손에 들려있던 까만 망태기. 내용물은 수돗가로 옮겨져 빨간 고무대야에 드르륵 부어졌다. 입에서 보글보글 거품을 뿜는 돌게였다. 사태 파악이 빠른 녀석들은 서로의 등껍질을 타고 대야 끝에서 뒤집어지기를 반복했다. 동생과 나는 얼른 감나무 가지를 주워와 뒤집어진 게 들을 바른 자세로 돌려주었지만 헛수고였다.
우리는 열 살과 여덟 살이었지만 돌게들의 운명을 잘 알고 있었다. 게들은 옆으로만 길 줄 알지 앞날을 내다보는 재주는 애초부터 없었다. 안쓰러운 마음은 들었지만 며칠 후면 맛있는 간장게장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욕실로 들어가 헌 칫솔 2개를 들고 나왔다. 다른 짐을 들고 늦게 당도하신 아빠도 우리 곁에 앉으셨다.
멋모르고 동생과 돌게를 가지고 놀다 몇 번이나 '악' 소리치며 피를 봤다. 그렇다고 이렇게 재미있는 손질을 포기할 수 없는 일. 시골에 살다 보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장난감이 된다. 아빠는 우리가 또 다칠까 봐 뭉툭한 가위로 살아있는 게 들의 양쪽 집게 끝을 잘라 다른 대야에 옮겨 담아 주셨다. "너 하나 나 하나" 우리는 거기에서 한 마리씩 게를 꺼내어 칫솔로 사정없이 등과 배를 문질렀다. 마지막으로 고무장갑을 낀 엄마는 한 번 더 물로 헹궈 물기를 뺐다. 정신이 혼미해진 게 들은 이제 반항할 힘도 없는지 하늘을 보고 누워 발끝만 까딱거렸다.
"이제 너희들이 할 일은 다했어. 가서 다른 거 하고 놀렴."
게들을 주방으로 옮긴 후 간장 물은 엄마보다 요리를 잘하셨던 아빠께서 끓이셨다. '3일 후면 간장게장을 먹을 수 있겠구나.' 한밤중에 물을 마시러 냉장고 속 델몬트 유리병을 꺼낼 때마다 깊숙이 놓여있던 간장게장을 보며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3일 동안 간이 잘 베인 게들은 점점 진 고동색으로 변한다. 딱딱한 껍질 안쪽까지 간장을 품은 게장.
게장 손질은 언제나 아빠께서 해주셨다. 접시에 담긴 3~4마리 게의 등껍질이 하나씩 열릴 때마다 '우지끈' 소리가 났다. 배를 감싸고 있던 껍질과 부채골 모양의 아가미, 2겹으로 겹친 입이 차례로 제거되었다. 그 후 몸통은 정확히 반으로 뚝 갈라졌다. 그 일련의 해체 동작을 6개의 눈동자가 함께했다. "이건 우리 딸 거." 하며 등껍질에 붙어있는 노란 알이 김이 폴폴 나는 쌀밥 위에 놓였다. 투명한 속살을 비집고 나온 몸통 한쪽은 엄마 밥 위에 다른 한쪽은 쭉 짜서 동생 밥에.
"우리 다 주면 아빠는 뭐 드세요?" 내 질문에
"이거 있지"라며 아빠는 집게발을 입안으로 가져갔다.
"커서 시집가면 꼭 게장 손질해 주는 남자 만나야 할 텐데... 아빠 생각 많이 날 걸"
"시집 안 갈 건데~" 하며 나는 쓱쓱 밥을 비벼 먹었다.
열 살 꼬마에게 '결혼'이란 너무 먼 이야기였으므로, 아니 아빠는 딸이 어른이 되고 시집을 가도 항상 그 자리에서 간장 게장을 손질해 주실 것만 같았으니까.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게장이 식탁에 올라올 때면 늘 아빠는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해체 작업을 시전 하셨다. 감정 표현에 서툰 아빠는 한 번도 내게 "사랑한다"라는 표현을 말로 해 주신 적 없으시다. 하지만 언제나 간장게장의 첫 등껍질은 딸인 내게 내어주셨다. 그렇게 나는 아빠의 사랑을 먹고살았다.
30년이 흐른 지금, 뇌경색으로 한쪽 손이 불편한 아빠께서는 더 이상 딱딱한 게딱지를 잡지 못하신다. 단단했던 이도 나이와 함께 쇠약해졌다. 이제는 내가 든 가위가 아빠의 손 역할을 대신한다. 등껍질에 붙어있던 노란 알들을 수저로 긁어 쌀밥에 쓱쓱 비벼드린다. 아빠는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가슴 한편이 불에 덴 듯 따끔거린다. 우리는 서로의 맘을 들여다본다. 나는 나머지 게의 아가미를 떼어 반으로 잘라 하나는 반쪽은 엄마 밥그릇에 반쪽은 아이의 밥 위에 꾹 짜준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다운 시절이 갈바람에 스치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