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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Jun 19. 2020

네가 왜 거기서 나와~(2)

tv에서 만난 그 녀석

"왜 너 불렀는지 알지? 야~~ 나 좀 보라고..."

"......"

 왜 이 여자애가 부른 건지 알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하라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수업 시간에 그 애가 내 노트에 장난친 걸 본 건가? 아니면 내가 그 애 집에 가서 침대에 누웠다 온 걸 안 건가? 그것도 아니면 반장이 나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한 건가? 머릿속이 복잡하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고개를 푹 숙인 채 운동화 끝으로 질퍽한 땅만 파고 있었다. 내 기분은 딱 흙으로 얼룩진 신발 같았다. 신발이 점점 더러워질수록 짧은 시간은 길고 버겁게만 느껴졌던 여린 나...

"촌스러운 게 말도 잘 못하면서~ 나 반장 여자 친구거든. 애들이 그러는데 네가 그 애 좋아한다며... "

"ㅠㅠ 좋아하는 거 아니야..." (개미도 이것보다 더 크게 말했을 것 같다.)

"그러면 증명을 해보던가~~"

뭘 어떻게 증명을 하라는 거지? 그 여자아이의 말은 이랬다. 내가 반장을 좋아하는 게 아니면 반장과 애들 앞에서 그 애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라는 것! 왠지 모를 억울함이 목구멍을 타고 기어 올라왔지만 손발이 떨려 빨리 이 자리만을 피하고 싶었던 소심한 나는 그렇게 "알았어"라고 대답한 뒤 당당하게 걸어가는 여자아이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음날 반 아이들이 삼삼오오 쉬는 시간 모여있을 때 나는 그 여자애가 시킨 대로 말했다. 반장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사실을 말하는 건데도 수치심과 비참함이 온몸을 감싸고돌았다. 당장이라도 교실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도 없었던 나는 책상에 엎드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그 누구도 우는 나에게 괜찮냐며 말을 걸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드라마나 책에서처럼 백마 탄 왕자가 나를 대변해 주는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반장까지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쿨하게 내가 왜 친구들 앞에서 그런 것까지 인정해야 하냐고 따져 물었을 텐데~ 순수를 가장한 바보스러움. 그래 나는 그 당시 그랬다. 

"나는 반장을 좋아하지 않아."라고 말한 여파로 일상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여름을 지나고 있을 무렵이었지만 교실은 늘 차가웠고 반장은 거리를 두며 날 멀리했다. 내게 직접 전해야 할 이야기도 다른 아이를 시켜서 전했고 인사도 하지 않았으니까... 곁에 가서 "안녕"이라고 짧게나마 인사하고 싶었는데 그 애의 외면이 서운했던 건지 복도와 교실에서 스칠 때마다 울컥울컥~ 화가 났다가 스스로를 변명했다가 꿈속에서 그 애 방에 가 하소연한 적도 있었다. 내 계절은 그렇게 계속 겨울. 겨울. 겨울. 

졸업 후 나는 여중, 그 아이는 바로 옆 남중에 입학했고 1학년 말 즈음 아빠 역시 회사 이직으로 다시 원치 않았던 전학~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때마다 정신이상이 걸릴 지경이었다. 이런 내 상태를 말하면 부모님께서 걱정하실까 봐 꾸역꾸역 다니는 학교생활은 여전히 끔찍했다. 정들면 또 이별일 텐데 친구를 사귀어서 무엇을 할 것이며 혹여 괜한 오해가 생겨 초등학교 때 같은 일이 벌어질까 봐 나는 전전긍긍 있는 듯 없는 듯 혼자 생각하는 시간은 부쩍 늘어갔다.

'반장은 남중에서 열심히 학교생활을 하고 있겠지. 나 같은 건 벌써 생각도 안 할 거야.'  학생 신분으로는 남자 친구를 사귀지 않겠노라 상당히 보수적이었던 내게 첫 스킨십이자 관심이었으니 그 아이를 떠올리는 건 여린 감수성의 소녀에겐 어쩌면 당연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혹시 다시 만나게 된다면 묻고 싶었다. 왜 내게 친절을 베풀었는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아이들 앞에서 말해서 자존심이 상했거나 아니면 상처가 된 건 아니었는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네 여자 친구가 시킨 일에 나는 무서워서 그랬던 거라고~ 중학교 내내 후회와 미련만 꿀꺽꿀꺽 삼켰던 나...

내 바람이 하늘에 닿은 건가?? 중3 아니 고1~ 주말에 아빠 강연을 따라나섰던 나는 그 자리에 그 애아버지와 그 애를 만났다. 3년 만에 만난 반장은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있었고 가끔 얼굴에 보이는 장난기를 온데간데 없어졌으며 왠지 사회 반항아 같은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 멀리서 봤지만 서로를 알아봤으니 이젠 내가 용기를 내야 할 차례.

아빠들께서 이야기하실 때 뚝 떨어져 앉아있는 그 아이 곁으로 발걸음을 옮겨 딱딱한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

"한 번씩 궁금했었어. 그런데 너 많이 달라졌다... 있지~ 그때 말이야."

나는 말하고 있는데 이 녀석은 정면만 응시하고 있다. 나는 용기 내어 변명 중인데 마치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우두커니 앉아있는 그 애. 내 말소리는 그 아이의 귀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공기 분자로 없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때 말이야... 그게..."

"별로 그 이야긴 하고 싶지 않은데..."

"... 미안해. 그냥 내가 미안해..ㅠㅠ"


나는 멍청한 거다. 눈물을 흘릴 타이밍이 아닌데 왜 울어? 3년 동안 "미안하다"라는 말을 하려고 기다린 거니~ 사춘기 소녀의 감성이 고장 난 게 분명하다. 나를 외면했던 서운함, 그때 말하지 못했던 변명과 후회들이 짠물이 되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야 나는 인정했다. 이 아이를 좋아했다는 걸~ 날 대했던 따뜻함이 고마웠음을~ 내가 진짜 아이들 앞에서 하고 싶었던 말은 반장에게 너무 고마웠고 좋아한다는 솔직한 고백이었다는 걸... 

"나는 흑... 그냥... 너무... 미안해ㅠㅠ 사실은 너 좋아했는데 여자 친구는 있고 너한테 많이 고마운데 말도 못 하고 속상하고.... (울면서 말하니 마구마구 꼬인다.)"

"알아. 나도 너한테 서운했어. 자존심도 상했고... 화도 났어. 그만 울어. 다 아니까..."

눈물이 멈출 때까지 그냥 바라보던 그 애가 피식 웃는다. 헉~~ 성격은 안 변했구나. 여전히 시크하다. 첫 스킨십, 첫 고백도 그렇게 한 사람이 되었다. 평생 내가 먼저 좋아한다고 고백한 사람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라는 걸 그 아이는 예상했으려나...^^


그 후로 우린 사귀었을까? 아니 그런 일은 현실에서는 없었다. 다만 나중에 어른이 되면 그때 다시 보자. 그 의미 없는 약속이 마지막이었고 그 아이는 대학으로 나는 사회로 각자의 길을 걸어갔다. 가끔 친구의 싸이에서 파도타기로 그 아이의 모습을 보았는데~ 원하는 일을 하면서 많은 나라를 여행하는듯했다. 어떤 사진은 긴 머리에 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러 외국인 친구들과 사진을 찍은 모습.. 어떤 사진은 말끔하게~ 반할 만큼 근사한 남자가 되어 여자 친구와 찍은 모습. '잘 지낸다니 다행이야. 나도 잘 지내고 있어.'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분명 그 녀석이다. 하얀 가운을 입고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니 역시 뇌섹남. 너는 꿈을 이루었구나. 갑자기 찌질하게 울면서 고백했던 내 모습이 생각나 얼굴이 붉어졌다. 청소에 몰입하고 싶었는데 몸은 말을 안 듣고 아이 손에서 리모컨을 빼내 물끄러미 tv 속 그 녀석을 지켜봤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벅차올랐다. 어쩜 말도 저렇게 잘하는지...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지켜보던 아들이 "엄마 저 삼촌 아는 사람이에요?"

"응^^ 잘생겼지? 엄마랑 학교 같이 다녔던 삼촌이야. 엄마 친구이자 첫사랑이라고 할까? 쉿!! 아빠한테는 비밀." 주말 아침. 아들과 나에겐 이렇게 둘만의 비밀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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