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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Aug 16. 2023

잃어버린 향기가 코끝에 닿았을 때.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마르셀 프루스트>


달그락달그락 냄비와 국자가 내는 소리에 주방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방과 주방 그 경계에 버티고 서있던 미닫이문. 불투명 유리창에 비친 엄마는 선명해졌다가 이내 부해졌다. 미닫이문은 아이 손바닥만큼 열려 있었다. 드르륵 큰소리로 문을 열지 못하고 그 틈 사이로 요리에 집중한 엄마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싱크대를 가득 채운 크고 작은 그릇에는 빨갛고 하얀 얼룩이 잔뜩이었다. 숨을 들이마시자 생선과 무가 익어가는 매콤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재채기가 나올 것 같아 엄지와 검지로 코를 꽉 잡았다. 하지만 늦었다. "에취~" 하는 소리에 엄마의 손과 발이 멈췄다.


"고등어조림했어. 물론 맛있다고는 장담 못 하겠네."

"맛있겠죠. 다만..." 나는 말끝을 흐렸다. 아빠가 요리를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말은 생략하고 엄마 얼굴을 보며 입꼬리만 씩 올렸다. 


"넉넉하게 했으니까 삼촌한테 좀 갖다주고 와. 아마 집에 있을 거야."

삼촌이라는 말에 반쯤 벌린 미닫이문을 확 열었다. 내 얼굴빛은 보름달 마냥 환해졌다.


"둘째랑 같이 다녀와." 에잇. 좋다 말았다. 둘째 이모랑 같이 다녀오라니. 엄마의 한마디에 보름달은 금세 초승달이 되었지만 그래도 삼촌을 본다는 것에 만족하며 반찬들을 받아 들었다.


"이모, 삼촌한테 다녀오래."

"너 혼자 다녀와. 금방이잖아."

"정말 나 혼자 다녀와도 돼?"

"이것만 하고 갈게. 집에 같이 오면 되지." 이모는 벽에 기대앉아 손만 까딱거렸다. 오른손에는 굵은 코바늘, 왼손에는 연회색 털실이 돌돌 말려 있었다. 며칠 전부터 뜨기 시작한 목도리의 끝이 보였다. 

"정말 같이 안 갈 거지?" 물었다가 같은 답을 듣고서야 방문을 닫았다.




11월, 먼 곳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마른 나뭇잎 냄새와 밤의 향기가 섞였다. 까만 봉지에 담긴 고등어조림과 반찬들을 조심히 들고서 5분 거리에 삼촌 집을 향해 걸었다. 아빠의 후배이자, 이모와 동갑인 정호 삼촌. 가정 형편이 어려워 일찍 독립한 삼촌은 아빠 옆에서 일을 배우기 위해 시골로 이사를 왔다. 23살. 아빠는 삼촌을 보며 '그 나이는 돌도 씹어 먹을 수 있는 나이'라고 했지만 아홉 살 나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삼촌을 처음 본 그날, 내 얼굴은 잘 익은 홍시 같았다. 아기 때 보고 국민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봤으니 그전에 기억은 삭제된 것이다. 나를 보면 삼촌은 "귀엽다"라는 말을 자주 꺼냈다. 나는 그 말을 "예쁘다"라고 번역해서 들었다. 170, 마른 몸, 웃을 때 사라지는 반달눈, 하얀 이들이 쏟아질 듯 삼촌은 크게 웃었다. 이마에 난 붉은 여드름이 몇 개가 아직도 소년미를 발산했다. 내 눈에 '브레드 피트'였지만 훗날 엄마와 이모는 삼촌이 '짐 캐리'를 닮았다고 말했다. 그 괴리감은 어른이 되어서도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삼촌 집으로 향하는 골목에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맛은 없어도 삼촌은 분명 좋아하겠지.' 나는 맨발로 이모의 꽃무늬 슬리퍼를 신고 나왔다. 헐떡 거리는 슬리퍼가 빨라졌다. 먼발치에 삼촌이 세 들어 사는 파란 지붕이 보였다. 돌담과 붙어있는 유리창에서 노란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정호 삼촌" 큰 소리로 삼촌을 불렀다. 문을 열고 삼촌이 웃으며 뛰어나올 것만 같아 주먹만 한 내 심장이 두근거렸다. 슬리퍼를 뚫고 나온 발가락이 추위로 붉게 변했지만 어둠이 그 빛깔을 훔쳐 갔다. 온통 정신이 방문을 향했다. 그러다 몸이 휘청 앞으로 쏠렸다. 우당탕 손에 들려있던 고등어조림과 반찬이 시멘트 바닥에 굴렀다. 그 소리에 놀라 문을 열고 나온 삼촌은 비련의 여주인공을 바라봤다.


활짝 열려있던 대문 턱을 왜 보지 못했는가. 내 빨간 발가락들을 숨겨준 어둠에게 고마워했던 마음은 싸늘하게 식었다. 바닥에 흩뿌려진 붉은 고등어조림 국물은 삼촌이 마루에 불을 켜자 눈앞에 선명해졌다. 나방들이 놀리 듯 불 주위를 날아다녔다.


"괜찮아? 많이 다쳤어?"

"으윽" 내가 뱉은 잇소리에 삼촌은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내 발을 살폈다.

"상처는 없는데 삐었나 보다. 많이 아프지?" 언발을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감쌌다. 아마 엄마가 나를 봤다면 "너 왜 이렇게 칠칠치 못하니?" 나무라셨을 텐데 삼촌은 꼼꼼하게 내 다리를 눌렀다. 눈물이 핑 돌았다. 때마침 이모가 삼촌 집에 대문을 넘었다.


"정호야. 어쩌냐. 미안해서." 이모는 땅에 흩어진 조림과 반찬들을 정리해 까만 봉지에 다시 담았다. 흙에 닿지 않은 반찬들도 있었지만 이모도 엄마의 요리 솜씨를 잘 알고 있었기에 다 한 곳에 담아 처리한 것이리라. 발은 아픈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니야. 형 집에 가서 먹지 뭐. 내가 업고 갈게."


오른발을 들고 벽에 기대 있던 내 앞을 넓은 등이 가렸다. 짧은 순간 '학교 신체검사를 했을 때 몸무게가 얼마였더라? 체중계의 숫자는 22kg 삼촌이 무겁다고 하면 어쩌지.' 업히지 못하고 눈동자만 굴리던 내게 이모가 "빨리 업혀라. 밥 먹어야 된다"며 등을 쿡쿡 찔렀다. 나는 팔을 뻗어 삼촌의 목을 쓱 감았다. 순식간에 몸이 들리면서 발을 감싸고 있던 슬리퍼 두 개가 시간차로 바닥에 떨어졌다.


"이것 좀 들고 따라와." 떨어진 슬리퍼가 이모 손에 들렸다. 왜 자기 슬리퍼를 신고 왔냐며 나무라지 않았다. 내심 이모가 살짝 고마웠다. 마루에 불이 꺼지자 사방은 다시 어두워졌다.


"밥 좀 더 먹어야겠네. 왜 이리 가볍냐. 아기네 아기" 놀리는 말에 얼굴을 더 어깨에 파묻었다. 양쪽 눈을 꼭 감았다. 늦가을 귀뚜라미 소리가 골목 가장자리에서 울렸지만 내겐 삼촌의 헉헉 숨소리만 온몸으로 느껴졌다. 태어나 처음 맡아보는 냄새가 삼촌 티셔츠에서 났다. 아빠와 친삼촌 이외에 남자에게 업힌 건 아홉 살 인생에 삼촌이 유일했다. 그 등 뒤에서 마음을 굳게 먹었다. '삼촌에게 시집을 가겠노라고, 이건 다 운명이라고'




우리 집까지의 거리가 왜 이리 짧은 건지, 슬리퍼를 들고 뒤따르던 이모는 어째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건지, 그땐 미처 몰랐다. 이모가 뜨던 목도리가 정호 삼촌의 친구의 선물이었음을. 연애 소설의 주인공은 우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는 삼촌과 그 등에 업혀 결혼을 꿈꾸던 9살 꼬맹이가 고스란히 남았다. 


누렇게 변한 감나무 잎이 가을바람에 떨어지고, 녹슨 대문이 삐걱 열리면 추수를 마친 들녘을 타고 지푸라기 냄새가 방 문에 닿았다. 지금도 고등어조림을 할 때마다 매운 향이 재채기를 부른다. 추억은 고유한 향기를 지녔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시켜 잊혔던 기억들을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놓는다. 내 몸에 새겨진 향기를 천천히 기록해 나간다. 그 시절 느꼈던 기쁨과 슬픔 그리고 그리움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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