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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May 11. 2020

너와 친해질 거야.

30년 가까이 고무장갑을 못 낀 사연.

"아직도 못 쓰고 있는 거야? 그러다 후회한다."

"그러게... 이제는 친해져야 하는데... 어휴..."            


외딴 시골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던 9살 내 인생. 부모님께서 시내로 출퇴근하시는데 1시간 반이었다. 바쁘신 두 분을 위해 학교를 다녀와 동생을 챙기고 집안일을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다소 높은 지대에 있었던 우리 집. 돌담 너머로 보이는 마을 전경을 옆으로 동네에서 가장 큰 단감나무가 있었고 앞마당에는 2층 계단식 밭이 있었다.  상추, 배추, 토마토, 깻잎, 오이, 호박, 참외, 수박, 포도, 고추, 고구마, 감자, 옥수수, 당근 등등 14가지 야채와 과일들을 심어놓으신 아빠 덕분에 요리는 하나의 놀이처럼 내게 즐거운 일이었다.


밭에서 금방 따온 재료로 이것저것 만들었다. 어떤 날은 달기도, 어떤 날은 짜기도 하고 그래도 엄마보다는 내가 요리는 더 잘했으니 아빠는 퇴근 후 기특하다며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요리는 재미있었으나 시골집에서는 내가 무서워하는 녀석들이 자주 나타나곤 했다. 천장에서 100m 매일 달리기 하는 쥐보다 더 싫었던 건 발이 많은 곤충들. 그리마, 노래기 그리고 무시무시한 지네...


밭에서 자주 나오던 이 녀석들을 보면 나는 혼비백산해서 도망가곤 했다. 다행히 아빠는 그런 나를 보며 "이런 건 잡아야 해." 호미로 꼭 눌러 명주실로 목을 돌돌 감아 빨랫줄에 대롱대롱 매달아 놓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네가 아픈 할머니를 위한 약으로 선물하시려 그러셨던 것 같다. 


어느 날 학교를 다녀와  배가 고픈 동생에게는 밥, 간장, 마가린을 쓱쓱 줬다. 만들 때는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치우는 일... 주방에 들어섰다. 키 작은 꼬맹이가 싱크대에 꼿발로 서서 고무장갑을 끼었다. 커다란 고무장갑은 손가락 끝까지 닿지 않아 헐렁헐렁했지만 고무장갑을 끼지 않으면 엄마에게 혼이 나는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물을 틀고 그릇에 시원한 물이 쏴아... 그때였다. "아야!" 순식간에 오른손 네 번째 손가락에 무언가에 물린 느낌이 들었다. 손을 빼보니 손가락보다 훨씬 굵은 녀석이 고무장갑 안에서 꿈틀꿈틀..ㅠㅠ  "으악~~" 온몸에 전기가 통한 듯 저릿저릿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손가락에는 선명하게 구멍 2개가 나있었고 피와 함께 붉게 부풀어 올랐다. 


너무 무서워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급히 마루에 나와 부모님이 오실 때까지 주방 근처에 가지 못했다. 놀란 나를 동생이 달래면서..."우리 향기! 괜찮아?" (동생은 초2까지 내 이름을 불렀다.) 퍼렇게 질린 나. 그 옆에 다독이는 동생.


부모님께서 오셨을 때 지네는 어디로 사라진 건지 고무장갑 안에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며칠 뒤 모두 잠든 저녁 똑같은 녀석이 엄마 등을 물어 집이 한바탕 또 뒤집어졌을 뿐... 아빠는 새벽에 농 바닥으로 들어간 지네를 잡느라 진땀을 빼셔야 했다. 


그 뒤로 고무장갑 트라우마가 생긴 나였다. 엄마가 아무리 고무장갑을 끼라고 해도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어서도 끼지 못했다. 겨우 김장할 때에만 면장갑을 끼고 고무장갑을 낀다. 하지만 그때도 식은땀이 줄줄.


이제는 오랫동안 가까이하지 않았던 고무장갑과 친해져야 한다. 부드럽고 촉촉했던 손이었는데 물을 많이 만지다 보니 푸석하고 갈라진다. 핸드크림을 자주 바르지 않으면 손 사이사이가 까칠까칠 아린다. 오늘도 친정엄마 집에서 설거지를 하는 나에게 엄마는 또 상기시켜 주신다. 

지네가 안 나온다고... 고무장갑 좀 끼라고...


집에 돌아오는 길 마트에서 붉은색이 아닌 연보랏빛 고무장갑 하나를 사 왔다. 

"그래~ 이참에 손을 좀 아껴보자. 30년간 고생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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