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 이 매거진은 Eli 작가님과 공동으로 하는 글쓰기입니다.
'킨츠기'라는 도자기 수리 기법이 있다. 깨진 조각을 밀가루 풀이나 옻칠로 원래 자리에 붙인 뒤 금가루나 은가루로 금이 간 부분을 따라 장식, 보수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수리된 도자기는 때로 깨지기 전보다 더 높은 가치로 평가받기도 한다. 금이 가고 깨졌다는 사실이 그 도자기만의 고유한 특성이자 시간을 품은 서사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킨츠기를 보며 나의 지난 실수를 떠올렸다. 내 잘못은 나를 쓸모없는 깨진 도자기로 만든 것이 아니라 완벽하지 않기에 단단하게 반짝이는 서사를 만들었다고. 금이 간 흔적은 부족하고 부끄러운 점이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려 했던 나의 흔적이라고. 흉터가 남았다는 건 내가 그만큼 치열하게 상처를 회복하며 살아왔다는 증거니까.
- 어른의 품위. (최서영)
중학교 입학식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집 안 공기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하다. 아직 교복을 맞추지 않았고, 초등학교 때 매던 가방도 그대로다. 아이는 별말 없이 방을 오간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도 한숨처럼 짧은 숨을 내쉰다. 웃지 않는다. 괜히 예민해지고, 사소한 말에도 표정이 굳는다. 긴장이라는 녀석이 몸집을 키워 집 안을 서성이는 느낌이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묻는다.
“긴장돼?”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내 눈치를 보다가 아니라고 말한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진심 같지는 않다. 아이의 어깨가 전보다 조금 더 굳어 있는 걸 나는 안다. 그 굳은 어깨를 바라보는 내 마음도 함께 경직된다. 엄마로서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올리려 애쓰지만, 걱정은 의지로 다뤄지는 감정이 아니다. ‘잘 적응할 거야. 아이를 믿어야 해. 괜찮을 거야.’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만, 그 말이 정작 내 마음 깊은 곳까지 닿지는 않는다.
아이의 불안은 현재형이고, 나의 불안은 과거에서 건너온다. 중학교라는 단어는 나를 오래전 교실로 데려간다. 전학을 가던 날의 냄새, 교탁 앞에 서서 어색하게 이름을 말하며 고개를 숙이던 모습, 괜히 작아지던 발걸음. 학교는 배움의 공간이기 전에, 매일같이 나를 시험하던 장소였다.
그 시절의 나는 내가 금이 갔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다만 내가 모자라다고 여겼다. 더 활달했어야 했고, 더 재치 있었어야 했고, 더 빨리 눈치를 챘어야 한다고. 겉으로는 무사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안에서는 잘게 실금이 퍼지고 있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하루를 마치고 돌아와 이불을 덮으면, 낮에 들은 말들이 뒤늦게 속을 긁었다.
다행히 아이는 초등학교를 무사히 마쳤다. 그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지는 못했다. 매년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담임선생님 면담 신청에 가장 빠른 시간을 잡았다. 아침마다 아이가 교문을 통과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동시에 어린 나도 그 문 앞에 서 있었다. 서로 다른 시간인데도 한 화면에 포개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엄마인지, 아직도 학생인지 잠시 헷갈렸다.
며칠 전, 『어른의 품위』 속 한 문장을 필사했다. 상처를 이유로 타인을 밀어내지 않는 태도, 흠을 숨기기 위해 더 큰 소리를 내지 않는 자세. 그 문장을 천천히 곱씹었다. 품위라는 말은 늘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어쩌면 그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경험에서 오는 온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친 적 있는 사람이 말의 결을 살피듯, 상처를 없었던 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그것에 끌려다니지 않는 힘. 그것이 어른다움 아닐까 싶었다.
다도를 하며 알게 된 ‘관입’도 떠올랐다. 유약 아래로 번져 있는 가느다란 실금은 일부러 새긴 선이 아닌데, 불과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그물처럼 얽혀 있고, 빛을 받으면 은은하게 드러난다. 처음엔 결점처럼 보이지만, 오래 바라보면 그 그릇만의 호흡 같다. 찻잔을 씻다가 물기를 털어내며 그 선을 유심히 본 적이 있다. 깨졌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미세하고, 아무 일 없다고 하기엔 분명히 존재하는 흔적.
생각해 보면 내 삶에도 그런 관입이 있다. 서툴렀던 선택과 용기를 내지 못했던 장면들은 한동안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지만, 지금은 조금 다른 의미로 남아 있다. 그때의 나를 이해해 주는 통로처럼. 완벽하지 않았기에, 비로소 타인의 어색함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균열이 없었다면 알지 못했을 감정들이다.
아이 역시 어른으로 자라면서 작은 금이 생길지 모른다. 친구와의 오해일 수도 있고, 기대만큼 나오지 않은 시험 점수일 수도 있다. 그런 가능성들을 떠올리면 여전히 마음이 쪼그라든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을 모두 막아내겠다는 다짐 대신, 다른 약속을 해보고 싶다. 혹시 금이 간다면 함께 바라보겠다고. 금을 없애려 애쓰기보다, 그 선을 따라 이야기를 들어주겠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는 네 편이야.”
그 말이 아이에게 작은 덧칠이 되기를 바란다.
어쩌면 중학생 엄마가 되는 나는, 지금 나 자신을 다시 이어 붙이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아이의 입학은 단지 아이의 일정이 아니라, 내 안의 오래된 장면을 조용히 불러내는 사건이 되었다. 예전의 나는 그 시간을 혼자 견뎌야 했다. 지금은 적어도 과거의 나와 지금의 아들을 이해하려 애쓴다. 차를 우리는 동안 물이 천천히 식고 향이 번지듯, 나를 가득 채운 긴장도 조금씩 자리를 바꾼다. 불안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지만, 그것을 다루는 손길은 예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졌다.
깨지지 않는 삶은 아마 없을 것이다. 다만 어떤 삶은 균열을 숨기느라 더 많은 힘을 쓰고, 어떤 삶은 그 선을 인정하며 다른 빛을 얹는다. 나는 후자이길 바란다. 매끈함을 자랑하기보다, 지나온 시간을 품는 사람으로 서고 싶다.
킨츠기의 도자기처럼, 내 삶도 여러 번 이어 붙여졌다. 그 자리에 금빛이 선명히 보이지 않더라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깨진 적이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깨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단단하다는 것은 더 이상 깨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혹여 깨지더라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미임을 알아 가고 있다.
아이의 새로운 계절 앞에서, 나 역시 조금 더 단단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서 있고 싶다. 두려움을 모른 척하지 않되, 그 두려움에 아이를 맡기지 않는 사람으로. 상처를 이유로 세상을 단정하지 않은 사람으로.
금이 간 자리에서 시작되는 것들을 믿는다.
그것이 내가 배우고 싶은 품위, 오늘도 차를 우리며 조용히 익혀가는 차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