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내 꿈 왜...찢었어?

by fragancia

"어서 저녁 먹어야지. 방에서 좀 나와라~"


늦게 퇴근한 엄마는 분주하게 저녁을 챙기고 계셨다. 평소 같으면 주방으로 들어가 도와야 할 나지만 학교에서 있었던 고등학교 진로 문제로 담임 선생님과 나누었던 대화가 나를 괴롭혔다.


'예고를 가는 게 어떠니? 내신도 괜찮고 실기시험도 잘 봤잖니. 이쪽으로 진로를 잡아보자.'

'......'


갑자기 기운 집안 사정을 말씀드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 많은 여중생은 그렇게 하교 후 방 안에서 해결이 나지 않는 문제들을 안고 끙끙 거렸던 시간이었다. 단지 한 곳. 오른쪽 책상 가장 밑 꼭꼭 숨겨놓은 자리에 두꺼운 일기장만이 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였다. 하루에 한 장 혹은 두 장의 일기를 쓰는 동안은 무척 즐거웠다. 진로와 이성에 대한 말 못 할 고민뿐 아니라 신체적 감정적 변화가 시작되었던 사춘기 시절이 오롯 기록되었다. 온기를 받은 글자들은 내 안에 꿈을 키워내고 있었다. 작지만 순수하고 여린 예술가는 일기장 속에서 밤마다 나를 기다렸다.


엄마의 저녁 식사 부름에도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일기장 속 아이를 만나고 있었다. 두세 번의 부름에 약간 신경질적으로 책상 의자를 집어넣고 주방으로 향했다. 어깨가 축 처진 아빠와 저녁을 차리느라 옷도 못 갈아입은 엄마, 중1 까까머리 남동생은 내가 식탁에 앉자 자기 방에서 투덜투덜 나오고 있었다. 가뜩이나 진로 문제로 걱정이 많아서 였는지 그날따라 밥알은 모래알을 삼키는 것 같았다. 침묵만이 가득했던 주방에서 엄마가 먼저 말문을 여셨다.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뭐라고 하셨는데?"

"아니 그냥 별거 아니에요."

"흠... 잇지 너 맞춤법을 잘 쓰는 게 글의 기본이야. 아니?"

"무슨 맞춤법이요?"

"그 있잖아.......... 그거 틀렸던데?"


지금은 내가 무슨 단어의 맞춤법이 틀렸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내가 어제 썼던 일기에 그 단어가 두어 번 언급되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정확히 틀린 맞춤법으로 말이다. 편하게 말하는 엄마와는 대조적으로 나는 순간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언제 읽으셨던 거지? 전부 다 읽으신 건가? 왜 그걸 밥 먹는데 말씀하시는 걸까?' 내 얼굴이 잿빛으로 변하는 걸 본 엄마는 말문을 닫으셨다.


나는 젓가락을 가지런히 두고 방으로 들어가 방금 썼던 일기장을 주방으로 가지고 나왔다. 거의 1년 동안 쓴 일기장은 일반 공책과는 다르게 매우 두꺼운 것이었다. 나는 보란 듯 가족들 앞에서 일기장을 쭉쭉 찢기 시작했다. 갈기갈기 찢겨 바닥에 떨어지는 종이들을 바라보며 내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오랫동안 내가 곱게 키워왔던 꿈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일기장의 마지막 장이 찢기는 동안에도 가족들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지켜만 보고 있었다. 몹시 충격을 받으신듯했다.


엄마의 흔들리는 눈동자는 "나는 네 일기장을 본적도 없고 관심도 없어."라는 말이 거짓임을 증명하고 있었고 아빠는 내게 안쓰러운 눈빛만을 보내고 계셨다. 찢어진 일기장을 주방에 남겨두고 나는 방에 들어가 일기장의 죽음을 하염없이 슬퍼했다.


나는 왜 그날 저녁 일기장을 찢을 수밖에 없었을까? 단지 그 안에 들어있는 꿈이 들켰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맞춤법의 잘못을 엄마가 읽었다는 창피함 때문이었을까? 부끄러움과 창피함 수치심?

그 모두 아니었다. 내가 일기장을 찢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것이었다. 일기장 한쪽에는 친구 보증을 서 집이 경매에 넘어갈뻔한 아빠에 대한 원망, 직장 생활로 집안일을 내게 떠넘긴 엄마에 대한 미움, 게임에 빠진 철없는 동생에 대한 이야기들까지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이 감정들을 엄마가 읽고 느꼈을 참담함, 서글픔, 속상함이 내가 일기를 찢게 만들었다.


평소에 착한 딸로 고분고분 말 잘 듣는 딸아이의 마음속에 이런 원망이 꿈틀거리며 자라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일기장을 읽으며 엄마는 얼마나 마음 아파했을까? 나는 그날 엄마에게 눈물로 사과를 했었어야 했다. 사춘기 딸이 철이 없어서 그랬노라고 가슴에 상처가 난 엄마를 안아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죄책감이 커다란 쇳덩이처럼 꿈을 향하던 내 발목을 잡아끌었다. 그날 나는 예고를 가려고 했던 내 꿈을 철저히 접었다. 그리고 다음날 상고를 가겠다고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이미 내 결심은 되돌릴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 위로받고 예쁘게 키워왔다고 생각한 어린 예술가는 한쪽으로 불량식품을 먹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아픔과 증오와 상처 그리고 미움이 아이를 병들게 했던 건 아닐까? 일기장 사건으로 엄마와 나는 커다란 벽이 생겼다. 끝까지 읽지 않았노라 말하는 엄마 앞에서 나는 굳게 입을 다물었고 가족에 대한 원망을 적은 죄책감으로 한 번도 불평 없이 직장을 다니면서 월급의 전부를 드렸다. 그것이 엄마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사죄였으니까...


그 후 내게 찢겨 상처받았던 어린 예술가는 꼭꼭 숨어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이젠 순순히 포기하고 다시는 찾지 않겠다고 여겼을 그 아이가 무척 보고 싶다. 냉혹한 현실에도 그 아이를 찾아 이제는 불량식품을 먹이지 않고 아껴주려 한다. 내 꿈을 찾기 위해 나는 오늘도 어린 예술가를 찾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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