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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Jan 13. 2021

어느 부부의 뒷모습.

20대 중반, 부모님과 떨어져 지낸 지 몇 개월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엄마 어디예요?"

"어? 나 지금 헬스장이야. 너 이쪽으로 오면 얼추 시간 맞겠는걸. 이리로 와"


나는 퇴근 후, 엄마 집에 아직 가져오지 못한 물건을 옮기려고 전화를 걸었다. 40대부터 운동에 푹 빠진 엄마는 가게에 손님이 뜸한 늦은 오후에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셨다. 수화기 너머로 쿵쿵거리는 음악소리와 아주머니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엄마는 이렇게 운동 열심인데, 딸은 운동 안 해?' 

'아유~ 엄마랑 딸 같이 다니면 보기 좋겠구먼...'


정신을 쏙 빼놓을 듯한 아주머니들의 목소리에 헬스장에 들어서기가 껄끄러웠다. 나는 6층 헬스장까지 올라가지 않고 1층에서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건물 앞에 도착한 지 5분 정도 지났을까? 엘리베이터의 내려오는 화살표가 보여 '엄마가 내려오시나 보다' 하고 엘리베이터 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때였다. 


띵동~ 듬성듬성 난 흰머리를 옆으로 곱게 넘긴 아저씨가 그 팔을 꼭 잡은 아주머니가 조심스럽게 엘리베이터 밖으로 발을 딛고 계셨다. 이제 막 결혼식을 마치고 퇴장하는 부부처럼 두 분은 서로를 보며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너무 보기 좋다. 어쩜 저렇게 사이가 좋으시지' 내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나는 동경의 시선으로 그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엄마가 나오셨기에 금세 나는 그분들을 잊고 이야기를 나누며 엄마 집으로 향했다. 며칠 후, 그날도 퇴근 후 엄마를 만나러 헬스장에 가는 길에서 그 두 분을 스쳐 지나쳤다. 

'여전히 손을 꼭 잡고 다니시네. 엄마 아빠도 저렇게 다니시면 좋을 텐데...'

그 후로도 엄마를 만나러 갈 때마다 공공연하게 그분들을 뵈었다. 늘 한결같이 손을 꼭 잡거나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볼 때마다 내 가슴 한편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그분들을 몇 번이나 뵈었을까? 집에 걸어오는 길에 엄마에게 질문을 던졌다. 


"엄마. 헬스장에 엄마랑 비슷한 시간에 운동하는 부부 계시죠? 엄마 기다릴 때마다 그분들 스쳤는데..."

"아~ 그 아저씨랑 아주머니 말하는 거구나? 좋아 보였어?"

"항상 웃으면서 손잡고 아니면 팔짱 끼고 가시던데~ 난 엄마 아빠도 그렇게 다니면 좋겠다 생각했지~"


한 손에 쭈쭈바를 빨며 나는 엄마에게 은근히 압박을 넣고 있었다. 아빠 손 좀 잡고 걸어달라고 말이다. 내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엄마는 이내 그분들의 사연을 들려주셨다. 


"그 집 참 사연이 많아. 다 큰 아들은 장애가 있다고 하더라. 아주머니가 케어를 다 했데~ 그런데 아저씨가 지금 시력을 점점 잃고 있나 봐. 얼마나 절망스러웠겠냐~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질 것 같더래. 그런데 자기가 무너지면 남편도 같이 무너질까 봐 운동하자고 했다더라~ 이젠 사물의 형태와 빛만 구분할 수 있는데 늘 아주머니가 함께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그렇게 운동을 다니시는 거야. 대단하지"

"아아... 눈이 안 보이신다고? 전혀 그렇게 안 보이던데..."

"엄마가 살아보니까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더라. 다 각자 힘듦을 안고 살아."


엄마와 헤어지고 혼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내가 그 아주머니의 입장이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다. 평생 보살펴야 할 아들, 시력을 잃어가는 남편. 암담한 현실에서 "우리 함께 운동해요. 내가 당신의 눈이 될게"라고 과연 나는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본 아주머니의 미소는 남편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에 가득 차 있었다. 


부부란 무엇일까? 같은 곳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사이. 절망 속에서 따뜻한 희망으로 불어넣어줄 수 있는 관계. 부족함을 보완해 주는 사람.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그분들을 뵐 때면 나는 가벼운 목례를 나누곤 했다. 언젠가 나도 그분들처럼 힘든 시기에도 두 손을 잡고 걸어가는 부부가 되기를 꿈꾸면서...

https://brunch.co.kr/@uriol9l/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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