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늘 확인하게 되는 '코로나 19 확진자 수' 2.5단계가 길어지면서 사람들의 피로도가 극에 달하고 있다. 1년 전만 해도 스스럼없이 만났던 지인들의 안부를 문자와 목소리로만 확인하는 지금. 바이러스 하나 때문에 세계가 들썩들썩거릴 거라고 처음에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코로나 완치자의 후유증을 쭉 읽어보다 잠시 잊고 있었던 기억 하나가 뇌 저장소를 뚫고 재생되었다.
2009년!!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내가 S사로 이직한 지 1년이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전날 늦게 마트를 다녀와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두통 때문에 새벽에 깨어 진통제를 하나 먹고 다음날 아침 출근했으나 몸 상태는 최악을 달렸다. 손발이 결리고 머리가 핑핑 돌면서 이 상태로는 도저히 일을 하는 건 무리였다. 빨리 말씀드려야겠단 생각에 팀장석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무거웠다.
"오늘 연차를 좀 써야 할 것 같아요. 팀장님~ 몸이 너무 안 좋아서요."
" 어쩌지?? 근무 인원이 안될 것 같은데 휴가를 뺀 사람들이 있어서 오늘은 일해줘야 할 것 같아. "
차라리 집에서 전화를 드릴걸~ 후회를 하며 자리에 돌아와 한참을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나를 바라보던 옆자리 동료가 걱정되었는지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얼굴이 너무 안 좋네. 괜찮아? (손을 이마에 대며) 불덩이잖아."
"저 물 마시고 올게요."
-철퍼덕-
일어나 휴게실로 가는 도중에 바닥이 나를 향해 돌진하는 것을 느꼈다. 그 후의 일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일어나 보니 양쪽에 드리워진 커튼과 수액 두 팩이 대롱대롱 달려 내 오른쪽 팔에 연신 생명수를 공급하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옆에 앉아있던 직원이 말해주기를 팀장님께서 날 업은 게 아니라 나보다 더 가녀린 동기 남직원이 업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을 때 너무 미안한 나머지 차라리 기억 못 하는 게 다행이다 싶었다. 응급실에서 검사를 해본 결과 드라마에서나 보던 '과로' 수액을 다 맞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열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온몸이 용광로처럼 끓다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가 단순히 과로라고 하기에는 처음 느껴보는 통증에 밤새 시달렸다.
다음날 남동생이 나를 끌고 다른 병원에서 검사를 했는데 결과는 "신종플루" 그것도 너무 증상이 심해서 당장 격리입원 대상자가 되어 바로 1인실로 감금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회사는 비상이 걸렸는데 내가 바로 신종플루 1호였던 것이다. 15층까지 있었던 S사는 엘리베이터부터 각층에 방역이 시작되었고 마스크를 쓰게 되었으며 개인 메일로 공고가 떴다고 하니 내가 근무하던 5층뿐 아니라 전층에 모든 직원이 "신종플루 U양"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병원에 감금되어 있음이 무척 다행인 순간이었다.
"너 완전 우리 회사에서 스타 되었어. 하하하~" 입사 동기의 전화 목소리는 다소 높아 있었으나 내 기분은 퇴원 후 퇴사를 생각하게 할 만큼 지하 10층에 가있었다.
눈을 떠 옆으로 보는 tv에서는 신종플루로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내가 입원해 있던 그 시기에 20대 남성 두 명이 신종플루로 사망했으며 유명 연예인 아들의 사망 소식이 뉴스를 타고 들려왔다. 여전히 나는 감금되어 치료 중이었으나 고열은 쉽게 잡히지 않았고 근육통은 더 심해졌다. 도대체 무슨 약을 어떻게 쓴 건지 두드러기 증상으로 온몸을 뜩뜩 긁어야 했던 밤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금방 나을 거라고 병원에 오지 않았던 부모님께서는 입원한 지 일주일이 넘어가자 걱정이 되셨나 보다. 전염률이 높다 하여 병실에 들어오지 못하고 문 앞 작은 창문 너머로 나를 바라보기만 하셨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아파서 우는 것처럼 보일까 봐 꾹 참으며 손만 흔들었다.
'아직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보고 싶은 것도 너무 많은데 나는 못하고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심각하게 죽음을 생각하며 휴대폰 메모장에 유서인지 아닌지도 모를 글을 쓰며 힘겹게 잠이 들었다. 다음날 입원 후 한 번도 연락 없던 비호감 팀장님의 전화가 울렸다.
" 아직 더 입원해 있어야 하나? 그래 이참에 푹 쉬어~ 그런데 서류 제출해야 해서 말이야 원무과에 가서 이 팩스 번호로 진단서 하나만 보내줄 수 있나?"
" 네~ 그럴게요."
통화 후 원무과에 진단서를 팩스로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고 그대로 누워만 있었다. 휴대폰 벨 소리에 놀라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늦은 오후였다. 액정에는 입사동기의 이름 석자가 반짝거렸다.
"너 진단서 보냈지?? 진단서 네가 확인하고 보낸 거야? 너 어떡하니~ 진단서 좀 보고 다시 연락 줘."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일이지? 동기의 말투에서 삐져나오는 웃음소리는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 불안함이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병실에서 나오면 안 되는데 슬리퍼를 질질 끌고 원무과에 가서 진단서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진단서를 펴 읽는 순간 아뿔싸
진단명 :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아... 나는 조류였나?
그랬다. 진단서를 팩스로 받아 든 팀장은 너무 웃어서 뒤로 넘어갔단다. 그 모습에 회사 동료들은 무슨 일인지 팀장님께 물었고 진단서를 돌려 보았다고... 그 순간 '신종플루 U양'은 '조류 U양'으로 바뀌었다. 나는 일주일 더 입원해 있으면서 '과연 내가 얼굴을 들고 회사를 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으로 편히 쉴 수 없었다. 조류 독감(AI)은 사람에게도 옮길 수 있으며 치사율이 34%나 되는 고병원성이라는 것을 검색으로 알게 되었을 때 당황스러웠다.
비교적 존재감 없이 다녔던 회사였는데 이렇게 확실하게 뇌리에 콕 박히는 별명이 추가되다니 인생이란 변화무쌍하다는 걸 또 한 번 알게 된 계기였다. 퇴원 후 첫 출근을 하는 날, 동료들의 격려와 환영을 받으며 나는 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기가 막힌 건 그 큰 회사에 내가 쓰러진 후 방역과 소독이 빨랐기에 나 홀로 신종플루 환자가 되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 후 항상 조류라고 놀렸던 비호감 팀장은 내가 조금만 아파도 조퇴를 시켜주셨다. 나중에 인터넷 검색을 해보며 알았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사람이 조류독감으로 보고된 일이 없단다. 아무래도 나를 진단했던 의사의 실수가 아니었을까? 만약 내가 정말 진단명대로 조류 인플루엔자 환자였다면 나는 치사율 30% 이상을 뚫은 여자로 운이 좋았다고 표현할 수밖에...
1인실에 감금되어 있으면서 나는 생과 죽음의 경계에 있었다. 코로나 확진자로 병원에 있는 환자들의 심정을 내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것도 그때의 고통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통이 심하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오직 이 시간이 지나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그 당시 신종플루 국내 감염자가 74만 835명으로 추산되며 그에 따른 국내 사망자는 263명이었다. 오늘로 코로나 확진자는 73,500여 명에 사망자가 1300명이다. 전 세계에서 코로나로 2백만 명이 눈을 감았다. 안타깝고 가슴 아픈 수치이다. 부디 지금 확진된 모든 분들이 건강하게 회복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들도 완치되어 훗날 기억을 돌아볼 수 있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