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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ah Oct 15. 2021

장애인용 카트 그리고 문화

한 문화에 소속되어 평생을 살아갈 때는 너무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부분이라서 공기처럼 의식하지 못하다가 다른 문화 속에 노출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예전 미국 유학시절에는 기숙사에서 살아서 큰 장을 볼 일이 거의 없었는데 가족과 함께 미국에 온 요즘은 큰 마트에 종종 간다. 그러면서 눈에 띄는 점 하나. 바로 장애인용 카트다. 


장애인이나 노약자들이 쉽게 장을 볼 수 있도록 전동 휠체어와 카트를 결합한 것인데 거기에 앉아 장을 보는 사람을 어느 마트에서나 쉽게 볼 수 있다. 그제야 한국에서는 큰 마트에서 휠체어에 앉아 장을 보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단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뿐 아니다. 모든 건물은 아니지만 많은 건물 문 앞에 장애인 및 노약자 버튼이 있어서 그걸 누르면 문이 자동으로 열린다. 그걸 보고서야 휠체어에 앉은 사람에게 무거운 문을 여는 것이 얼마나 힘들 것인지를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예전 아프리카에서 일하던 시절. 안경을 살 돈이 없어 생활에 불편을 겪고 장애인처럼 살아가던 아이가 생각났다. 장애를 규정하는 것은 신체 일부의 불편함,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기술의 유무나 제도의 유무일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아직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장애인으로 '만들고' 그들의 이동권을 제약하고 있는가. 


그렇다고 미국의 모든 시스템이 다 훌륭한가. 그건 또 아니다. 미국의 재활용 시스템은 대학교 등 일부 시설을 제외하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대부분의 식당은 차치하고 지금 우리가 사는 아파트 내에도 재활용 시스템이 전혀 없어서 병, 플라스틱, 종이 할 것 없이 모두 한 곳에 넣어서 버린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우유갑은 잘 포장을 뜯어서 그것대로, 병은 병대로, 플라스틱은 플라스틱 대로 분류하던 습관을 주입받은 사람으로서 멀쩡한 재활용품을 쓰레기통에 버릴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다. 


한국에서는 비닐봉지, 일회용 컵이나 빨대를 제약하기 위한 규제들이 속속 나오고 있지만 미국은 아직도 그런 변화들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한 번은 남편과 마트에 갔는데 점원이 거의 물품을 각각 하나씩 한 개의 봉지에 싸줘서 이 가게는 직원들이 사용한 봉투만큼 성과급을 주는 건가, 하고 농담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 정도로 절약이나 재활용, 혹은 환경 보호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의식 수준이 아직은 낮다. 


예전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에서 본 개발에 대한 통찰력 있는 문장이 떠올랐다.  


 "사회의 가치를 판단하는 여러 기준들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해본다면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구성원들의 행복이 그 척도가 되어야 하고 환경적인 측면에서는 유지 가능성이 그 척도가 되어야 한다"


구성원들의 행복과 환경적 유지 가능성(지속가능성). 


한 사회의 가치를 평가하는 여러 잣대가 존재하지만, 이 두 가지만큼 통찰력있는 기준을 보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어디쯤 와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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