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지를 만들 때는 일종의 지침이 있다. 구체적이고 민감한 내용은 나중에 묻는다. 첫 시작은 가볍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 부담스럽지 않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광범위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해서 세부적인 질문을 한다.
그런 지침에 충실하게 첫 질문은 가볍게 한다. “미국에 도착하고 나서 어떻게 지내셨어요?”
질문 자체가 너무 광범위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난민 여성들은 보통 “아 함두릴라” (신 덕분에) “잘 지냈어요” “괜찮았어요”라고 대답한다.
괜찮다고 대답하는 그들의 삶은 보통 괜찮지 않다.
어제 인터뷰한 여성은 미국에 와서 자신의 아이를 유산했다. 본인이 건강하고 아무런 이상 징후도 없어서 괜찮은 줄 알았다.
미국에 도착하고 나서 보험이 승인되고 병원에 가서야 아이의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기가 5개월이 된 시기였다.
미국의 난민 지원시스템은 대체적으로 훌륭하다.
1980년 난민법이 시행된 이후로 난민들을 위한 지원체계가 잘 구비되어 왔고 난민들 대부분이 저소득층을 위한 보험(메디케이드)에 가입하고 있다.
또한 미국에서는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사회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것 자체를 하나의 차별로 간주한다. 그래서 연방 정부의 지원을 받는 단체들은, 난민뿐 아니라 영어가 서툰 모든 사람들에게 통역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통역서비스를 요청하는 방법, 병원으로 가는 무료 교통서비스를 요청하는 방법 등을 배우고 익히면 보건 서비스를 받는데 큰 어려움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11명의 난민 여성을 인터뷰했는데, 대부분 비슷한 말을 했다.
“건강과 관련해서 큰 이슈는 없어요. 의료진 모두 친절했고 저를 존중해 주었고 통역이 있어서 큰 불편은 없었어요”
하지만 문제는 생활 그 자체다. 미국의 경우 모든 사업이 난민들의 자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정착하고 몇 달이 지나고 나면, 자신들이 타고 온 비행기값을 갚아나가야 하고 미국의 비싼 월세, 전기값 등도 스스로 부담해야 한다.
영어의 레벨은 굉장히 상이한데 영어를 좀 하는 사람들에게도 취업의 문은 높기만 하다.
요즘 인터뷰를 도와주는 통역사도 그렇고 그 남편도 영어를 잘하는 편인데 취업이 쉽지 않다. 몇 달째 인터뷰만 보고 있다.
그 상황에서 한 달에 백만 원에 가까운 월세를 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영어를 아예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벽이 더 높기만 하다.
통역을 도와주는 A는 자신의 국가에서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정부 기관에서 일을 하며 여러 국제기구와도 함께 일을 했었다고.
항상 아버지의 운전사가 자신을 수행해 주고 결혼한 다음에는 남편이 운전을 해줘서 운전하는 방법도 배우지 않았다.
그러다 아프간 정부가 탈레반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아프간을 빠져나왔다. 교육받은 여성으로, 더군다나 미국 정부의 장학금으로 공부를 마쳤기 때문에 언제 탈레반의 표적이 될지 모른다는 이유였다. 딸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고 싶다는 생각도 컸다.
작고 좁은 그녀의 집에 방문했을 때 그녀의 딸이 바닥에 누워있는 바퀴벌레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들이 살던 지역의 아름다운 풍경사진과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무수히 많은 요인들이 있다.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은 개인이 처한 경제적, 사회적 조건, 환경, 맥락이 그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궁극적으로는 그 사람의 건강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개념을 내포한다.
당장은 여러 제도와 지원이 있지만, 열악한 환경과 상황이 장기적으로 그들의 삶과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우려스러웠다.
난민이 되고 싶어 난민이 되는 이가 있을까. 최근 논문 작성을 위해서 미국에 난민법에 대해 조사하다가 미국 난민 재정착의 역사에 관해 정리한 글을 보았다.
거기에 한국 전쟁 시 한국 난민들의 사진도 있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우리도 한때 난민이었다.
그리고 그 역경을 딛고 일어날 수 있었던 데에는 다른 이들의 조건 없는 환대가 있었다.
환대와 연대.
불확실하고 위태하고 예측하기 힘든 삶 가운데서도 그래도 희망이라는 게 있다면 그 두 단어 속에 있지 않을까. 종종 그렇게 생각해 본다.
#2. 세상에 불필요한 경험은 없다. 그 경험의 가치를 아직 깨닫지 못했을 뿐.
미국에 도착하고 나서 여러 면에서 새롭게 적응해야 했지만, 가장 어려웠던 점은 바로 내 정체성이었다.
한국에서는 그래도 꽤 큰 단체에서 일했던 터라 내가 속한 분야에서는 어디를 가든 내 실제 실력과 능력과 상관없이 인정을 해주는 분위기였다.
미국에 와서 작은 모임에 갔는데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는 모 기관에서 일했다고 하니, 그 기관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어느 나라를 가든 소속된 기관의 이름을 대면 알고 반가워하던 경험을 하던 나로서는 당황스러웠다.
여기서는 영어가 서툰 외국인일 뿐이구나 하는 자각이 밀려왔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관심 있는 기관에 무급으로 인턴을 했다. 풀타임으로 수업을 들으며 둘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로 인턴으로 일을 했다.
난민 재정착 기관에서 난민들을 대상으로 병원이나 메디컬 택시 예약하는 일을 도와주고 그 일들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일이었다.
난민을 지원하는 인턴에서 연구자로 모자를 바꿔 쓴 지금, 그때 경험한 것들이 너무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어제 인터뷰를 한 여성의 아이가 아파서 병원예약을 해야 하는데 병원에서는 답이 없다고 했다.
문자를 보여주기에 봤더니 병원 예약을 하고 싶다고 아이의 이름을 문자로 보내놓았다. 전화를 해보니 통화가 되지 않는 번호였다.
아이가 아픈데도 병원 예약을 할 줄 몰라 되지도 않는 번호에 문자를 남겨두곤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을 아이의 부모를 생각하니 마음이 저려왔다.
두 아이의 병원 예약을 도와주고 예약하는 방법도 가르쳐주었다.
두 번째 인터뷰한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건강에 이상이 생겨서 병원 예약을 해야 하는데 난민 재정착 기관에 문의해도 감감무소식이라고 했다.
엄마에게 통역 서비스를 요청하는 법, 병원 예약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스피커폰으로 함께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그녀 혼자 통역 서비스를 요청하고 병원에 예약을 마쳤다. 진심으로 기뻐하며 고맙다고 거듭말하는 그녀를 보니 내가 더 기뻤다.
소위 말하는 개발도상국 현장에서 연구나 평가를 마치고 돌아올 때면 마음 가득 돌덩이를 짊어지고 오는 기분이었다.
역경이 가득한 그들의 삶 일부를 들여다보고 오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어제는 과거 경험을 살려 큰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에 그래도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의미 있는 연구를 하는 것도 좋지만, 그리고 그 연구로 정책적인 함의를 끌어내고 세상에 작은 변화를 일구는 일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그 변화는 종종 너무나도 더디다.
그 변화를 지향하면서 내가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더 고민하고 실천하고 싶다.
Think globally act locally.
그리고 연대와 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