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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한 Sep 04. 2019

바둑 단상

바둑은 의사소통의 게임이다. 수 하나 하나에서 상대방의 생각과 감정을 읽어내야하고, 그에 호응하거나 타협 혹은 반발하고 거절하는 방식으로 응대한다. 반대로 내가 선수로 나서는 차례에서는 상대를 설득하거나 미끼를 물도록 은밀히 속임수를 깔아두거나 허세를 부려 센 척하고 겁을 주기도 하면서 상대의 반응을 살펴본다.



소통의 게임인 만큼 바둑에서 고수와 하수의 차이는 표현 방식의 차이다. 고수는 알듯말듯 신비로운 은유의 수를 둔다면 하수는 직설적이고 탐욕적이다. 또 고수는 전체 판세를 고려해 착수의 강약을 유연하게 조절한다면 하수는 모든 경우에서 최대의 이익을 보고자하는 욕심에서 무리수와 악수를 두거나 너무 방어적으로 둬서 무력하게 패배하기도 한다. 고수의 수는 그동안 해온 연구와 학습에서 비롯된 깊고 다양한 방식의 수읽기에서 나온다. 하수의 수는 상대의 돌에 따라 즉각적 감정적으로 끌려다니는 경우가 많다. 하수의 직설적인 수는 1차원적이라 곧 바로 그 의도와 감정을 짐작케하니 미리 수를 내다보는 고수에게 당연히 휘말리게 되고 이길 수가 없다.



바둑은 의사소통의 게임이니 저마다의 소통 방식, 스타일이 존재한다. 프로 기사란 그 스타일을 단단하고 날카롭게 갈고 닦은 사람들이다. 그중에서도 시장에 통하는 자신의 개성을 극한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사람들이 초일류가 된다. 인간 사회로 비유하면 설득과 타협, 혹은 속임수의 귀재가 바둑 세계의 초일류가 되는 것이다.



초일류 기사들의 사주에서는 어떤 특징과 공통점이 드러나있을까? 의외로 대부분 비겁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비겁은 경쟁자가 눈앞에 드러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승부욕을 자극하는 요소가 된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애초에 승부욕이 있어야 지면 분해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복수의 칼날을 갈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창의적이고 전략적이라도 승부욕이 없으면 게임이라는 승부의 세계에서 도태될 것이다. 창의성과 묘수도 들끓는 승부욕으로 몰입한 자에게 금방 따라 잡히는 것이다. 바둑이라는 특수한 진로에 빠져들어 끝을 보게하는 것도 비겁의 주체성과 뚝심이 만들어낸다. 비겁이라는 동료들과의 공동 연구나 토론도 물론 프로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또 비겁은 타고난 생체 에너지를 뜻하기도 하니 몰입 대상에 투자하는 시간과 정신력도 마음껏 커질 수 있다. 바둑 뿐만 아니라 많은 유명 게이머들의 사주에서 비겁의 중요성을 자주 발견한다.



고도로 발달된 인공지능은 인간적인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채 승률을 높이는 정확한 수읽기를 바탕으로만 착수를 하니 인간이 이길 수 없는 경지에 오르는 건 시간 문제였다. 인공지능은 인간에게는 아주 커보여서 꼭 지키도록 집착할 만한 돌을 무심하게 버리기도 하고 엷음에서 두터움을 자아내는 감각의 차원이 다르다. 이제는 포석과 사활, 끝내기 등 모든 수읽기의 정확성과 효율성이 압도적이라 바둑의 신이 따로 없다.  잘은 모르지만 언젠가 양자 컴퓨터를 기반으로한 인공지능이 등장하면 절대 강자가 되겠지.



한편 감정 교류 없는 인공지능과의 대국은 매번 정답으로 응시해주니 공부하기엔 유용하고 흥미로운 면이 많지만 승부의 재미나 의미는 찾기 어려워보인다. 한 번은 기력이 비슷한 친구와 온라인으로 바둑을 두는데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기력 차이에 당황했던 적이 있다. 나에게 응대하는 그의 돌이 나와 비슷한 기력의 인간이라기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냉정하며 딱딱하고 정확하고 효과적인 것이었다. 바둑을 두는 내내 섬뜩한 기분도 들고 바위에 계란 치는 허망한 느낌이 들었다. 끝나고 물어보니 역시 인공지능이었다 한다. 인공지능으로 생길 수 있는 폐해의 예고편을 미리 겪은 느낌이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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