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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한 Mar 25. 2024

커리어

대학교를 자퇴하고 장사를 창업한 이후로 삶이 예측할 수 없는 경로로 흘러가는 듯하다. 부산에서 장사를 하다가 서울로 올라와서 동업을 하게 되고, 장사가 망하고 나서는 디자인을 배우는가 싶더니 어느새 명리학 공부에 빠져서 상담소까지 차려서 사주팔자 상담을 하게 되고, 나아가 영성 공부에 빠져서 상담소를 접고는 집필에 올인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지만 출판은 요원하고,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취업학원에 다니며 영상 편집을 배우다가 기묘한 인연을 만나 그만두게 되고 상담과 콘텐츠 동업을 진행하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엎어지고, 다시 그라운딩-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현재의 내 인생 첫 직장을 다니게 되었다. 그 직장 부서가 서울 어느 유명 사찰의 미디어팀이라는 점도 재밌다.


일관성 없이 이런저런 경험을 하면서 막 살아온 것 같은데, 내가 그동안 해온 모든 경험, 그 안에서 해온 고민과 그 안에서 익힌 노하우가 직장 일을 하는데 직간접적으로 도움이 된다. 부족한 인력으로 인해 일당백을 안 할 수가 없는 현재의 직장 환경이 역설적으로 뒤죽박죽 발산하는 나의 경험을 한 데 모아 발효시켜주는 것 같다. 물론 정신 없고 힘들기도 하지만, 다방면으로 부딪치며 다양하게 배우고 성장할 수 있으며, 그동안 거의 혼자서 겪어온 날것의 경험을 직장의 팀 차원에서 다시 소화시키니 거기서 얻어지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 직장의 팀이라고 해도 소규모의 인력에 체계가 확실하게 정해진 건 아니라서 나름의 주체성과 창의성을 발휘할 여지가 있다는 점도 다행이지 싶다.


스무 살 때 설날 용돈을 모아 DSLR 카메라를 사서 한동안 재미들려 찍고 다닌 적이 있는데, 그 감각과 재미가 흐려질 쯤 다시 직장에서 미러리스 카메라를 새로 구매해서 촬영을 하게 되었다. 이십 대 중반 쯤 여행 가이드 스타트업 초기 멤버로 잠깐 참여한 적이 있는데, 여기 와서 사찰 오디오 가이드 서비스를 런칭하게 되었다. 본래 낯가림이 심한 내향성이지만, 장사하고 상담했던 경험 덕분에 사회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대인 관계는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장사와 상담하면서 했던 기획과 브랜딩, 마케팅에 대한 고민을 여기서 SNS를 운영하며 다시 하고 있다. 디자인과 영상 편집을 배웠던 것도 콘텐츠를 제작하며 틈틈이 써먹고 있다. 종교철학에 대한 집필을 하며 익혔던 글쓰기가 여기서의 카피라이팅을 간단하게 만들어준다. 물론 여기서 처음 겪는(겪게 될) 새로운 경험도 많다. 본격적인 영상 촬영(드론 포함), 라이브 스트리밍, (AI를 활용한) 영어 번역, 보고서 작성, 새로운 관계 유형, 커뮤니티 참여(및 운영), 외주 협력 등등.


어쩌면 내가 그동안 살아온(일해온) 방식에 최적으로 부합하는 직장 환경이 이번 기회에 펼쳐진 걸 지도 모르겠다. 나로서는 그게 너무나 절묘해서 [나를 어떻게든 살아가게 만들기 위한/나를 성장시키기 위한] 하늘의 계획(배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점점 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직장에서 하고 있는 일련의 경험도 물론 훗날을 위한 재료와 동력이 되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상담과 콘테츠 동업이 엎어지던 차에, 가까이 사는 오랜 친구의 제안으로 친구 따라 사찰의 기본 교리 교육을 받다가, 2주 차에 교육하는 스님이 다른 일정이 생겨 교육에 못 들어오는 바람에, 대신 들어온 종무원이 행정직 직원을 채용한다는 얘기를 듣고, 불안정한 생계 탓에 덜컥 충동적으로 지원해서 다니게 된 직장인데, 이렇게 나에게 딱 들어맞는 환경이라는 게 한편으로는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필연적인 수순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최선을 다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직장 환경에 있어서는 부족한 능력은 끌어올리고, 나름의 전문성을 키우면서 '스페셜한 제너럴리스트'가 되고 싶다. 미디어-컨텐츠에 관해서 뭐든 어느 정도 할 줄 알지만 뭔가 다른, 뭔가 하나가 더 있는 사람. 철학에서 비롯된 깊이와 정성에서 비롯된 디테일한 감각을 콘텐츠에 녹여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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