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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한 Oct 11. 2017

아날로그 감성과 관계감

새벽에 일찍 깨서 1994년에 나온 홍콩 영화 <중경삼림>을 보고, 점심을 먹으면서는 1992년에 나온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았다. 내가 태어난 시기와 비슷한, 그러니깐 우리 부모님 세대가 보면 딱 공감될 만한 시대적 배경을 가진 영화이다. 영화를 보면서 지금은 당연하지만 그때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들이, 건너와 다시 이 시점에서 바라보니 참으로 낯설고 생소한 것이었다. 역사적인 '사건'이 되어 다시는 그 물건, 서비스가 나오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발명품과 기술, 휴대폰-스마트폰과 SNS를 말한다. 


내가 초등학생 저학년일 때만 해도 휴대폰이 없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때는 딱히 스마트폰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유년 시절은 아주 막연한 감각으로 살아가는 시기라 주어진 장소 위주로 사고하면 되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만 받아들여도 충분하다. 그런데 스무살, 성인이 될 때부터 스마트폰을 써오기 시작한 나로서는 휴대폰 없이 20대를 산다는 감각이 뭔가 까마득하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휴대폰이 없던 세대로서는 그게 말그대로 당연한 일이었고, 그래서 (일반 대중이라면) 불편이라는 감각을 가질 조건조차 없는 것이다.


휴대폰-스마트폰, SNS 기술을 활용하는 세대와 그렇지 못한 세대는 아마도 '관계'를 대하는 기본적인 감각부터 확연히 다르지 않을까. 스마트폰은 실시간이고, 항상 백퍼센트 가능성으로 언제든지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시간에 대한 인내심이 매우 작아졌고, 연결에 대한 집착-강박이 생기게 되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면 남자 주인공이 갑작스레 쓰러져 병원에 입원해 자신이 운영하는 사진관을 오픈하지 못하게 되는데, 단골 손님으로 만나게 된 여자 주인공은 아무런 사정도 모르고 어느날부터 매일 불꺼지고 굳게 문닫힌 사진관을 며칠간 무력하게 바라봐야만 했다. 스마트폰이 일상이 된 시대에 스마트폰의 탄생을 함께한 세대로서는 매우 이질적인 장면인 것이다. 같은 하루라도, 지금의 기다리는 하루와 그때의 기다리는 하루는 심리적 길이와 받아들이는 체감이 완전히 다르다.


기다리는 시간의 밀도와 예민함은 지금이 그때보다 훨씬 높아졌다. 그때의 관계는 그래서 지금의 관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질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좀 더 어른스럽고, 좀 더 우직하다. 그러기 위해서, 혹은 그렇기 때문에 상호간의 정직함과 신뢰감이 지금보다는 기본적으로 좀 더 두터웠으리라. 관계의 거리는 스마트한 지금이 더 가깝겠지만, 관계의 깊이는 미련했던 그때가 더 깊지 않았을까. 나아가 관계의 거리는 이제 지역-공간에 상관없이 관계의 친밀도를 기준으로 비례할 것이다. 그래서 바로 옆집 사는 이웃이라도 아예 남남으로 지내고, 저 멀리 미국 사는 친구라도 아주 가까울 수 있다. 과거에는 관계의 친밀도나 수명이 대체로 공간 기준으로 정해졌을 텐데.


<중경삼림>을 보면 전화를 걸고 받는 입장도 지금과 다르다. 지금은 당연히 누릴 수 있는 발신-수신 정보를 그때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으니 발신자든 수신자든 막연한 설렘과 어떤 미지에의 호기심이 기본으로 깔리는 것이다. 연락이 안되면 두 영화 모두에서 나왔듯이 시간을 공백으로 두고 불확실한 기일내에 메세지가 전달되길 바라며 손편지를 적어놓는다. 미지, 불확실, 공백의 시간에 불안, 설렘, 호기심을 깔고 어떤 감정과 느낌과 생각을 하염없이 발효시키는 아날로그 감성이, 영화따라 아련하고 한편으로 그립고, 낯설기도 했다. 다시 못 돌아갈 시절이고 다시 못 느껴볼 감각일 것이다. 책이나 영화로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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