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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한 Oct 11. 2017

신비로운 바닷가 여인

그녀를 직접 만나게 된 게 얼마 만일까? 온라인, SNS에서는 종종 안부를 나눴지만 스쳐지나가지 않고, 이렇게 약속을 잡아 직접 대면한 건 거의 9년만의 일 아닌가? 긴 세월 치고는 꾸준히 만나온 친구마냥 자연스러웠다. 그 정도 세월이 흘렀는데 그 정도로 스무쓰했던 만남은 오히려 부자연스러웠다고 말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시외버스를 타고 해운대역에서 밤 12시에 내렸는데, 마침 우리는 전부터 '오랜만에' 만나기로 했었고, 또 마침 그녀는 해운대역 바로 앞에서 산다는 것이고, 일하는 가게도 마감 시간이 딱 밤 12시라고 했다. 우리 만남이 그렇게 스무쓰할 수 있었던 건 이렇게 애초에 약속이 운좋게 아주 깔끔히 진행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부산에 발을 들이자마자 그녀와 만나게 된 것인데, 약속 장소에 먼저 와 기다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무언가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옷을 엄청 편하게 입고 있어서 그런 건지, 해운대 바닷가 근처에서 살고 있어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뭐랄까 신비로운 바닷가 여인 같은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밟은 부산 땅과 피부가 먼저 느낀 부산 날씨, 부산 냄새가 어떤 영향을 끼친 걸 수도 있겠다. 그녀가 짓는 편안한 미소와 느릿하고 여유로운 걸음걸이, 온화하고 차분한 말투, 소곤거리는듯 작지만 확실한 발음과 그윽한 눈빛이 그런 분위기를 더욱 진하게 만들었다. 비록 오랜만에 만났지만 우리가 한때 꽤 친하게 지냈던 중학교 동창생이고, 꾸준히 연락을 주고 받은 게 나에 대한 경계심을 완전히 풀게 만든 건가. 그녀와 함께 카페로 걸어가며 '여기가 과연 부산이구나'하고 실감했다. 역시 부산은 포근한 것이다.


중학교 3학년때 그녀를 좋아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기억이 맞다면 그녀도 내게 호감이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동시에 좋아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참으로 소심한 미련 곰탱이였고, 그녀 입장에서도 먼저 고백할 정도로 마음이 끌리거나 적극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정쩡하게 지내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사이로 지나치고 말았다. 그때 그 좋아했던 마음, 설렜던 마음, 아쉬웠던 마음은 세월이 흐르면서 분명 점점 작아졌겠지. 하지만 어쩐지 그것이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감정과 기억은 delete키로 지울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애써 외면하고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된 어떤 감정이라도 여전히 마음속 어딘가에는 끈질기게 잔존해있지 않을까. 좋든 싫든 간에. 어쩌면 9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다시 정식으로 얼굴을 맞대게 된 그녀와 함께 나의, 우리의 오래된 감정들, 사라진 줄 알았던 그 감정들과도 슬며시 마주하게 된 것이 아닐까? 


옛 감정들의 아늑한 촉감과 아련한 색채가 그녀 주위를 가득 물들여놓은 것이다. 그래서 어제까지만 해도 평범한 가게 매니저였던 그녀는 나와 접촉한 순간 신비로운 바닷가 여인이 된 것이다. 그날 해운대 바닷가의 파도도 아마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쳤을 것이다. 교교하고 낭만적인 달빛을 받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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