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끝나지 않았다
2년 전 룸메이트로 만나서 알게 된 동생에게서 뜬금없이 전화가 왔다.
동생: 언니 잘 지냈어요? 오래전부터 언니 생각은 계속했는데요.. 작품 전시하면서 시간도 남고 해서 오늘 연락해 봤어요.
룸메이트로 두 달을 살다가 남자친구 집에서 신세 지기로 했다며 방을 비웠고, 갑자기 통고를 해 미안하다며 작고 하얀 얼굴을 찌푸렸던 그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을 때 반가웠고 내가 사는 동네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녀는 똑똑하고 자기중심이 있는 친구다. 바람 불면 쓰러질 것 같은 가느다란 체구에 뼈 있는 말들을 조곤조곤하곤 했었다. 오랜만에 즐겁게 수다를 나누는데 갑자기 내게 이런 말을 던졌다.
동생: 언니 이젠 룸메이트랑 살 나이는 지나지 않았어요?
나: 그렇지. 그건 그래.
당황한 나머지 할 말을 잃고 얼버무렸다.
매년 아파트 계약서에 사인을 할 때마다 올해가 룸메이트 생활 마지막이라며 합리화했었다. 재계약 시 거쳐야 하는 줄다리기식 협상도 부담으로 다가왔고 300불을 올리겠다는 터무니없는 건물주 요구에 일 년 동안 협상 시 사용할 증거 수집에 열혈 올리는 내 모습이 징그러워지는 시점이기도 했다.
생판 모르는 사람과 한 공간을 공유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배려해도 맞춰 나가야 할 것이 많고, 맞추다 보면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한 번은 내 음식을 아무렇지 않게 먹는 룸메이트와 언쟁을 한 적이 있다. 직장에서 오버타임 후 지친 몸을 이끌고 한인마트에 들러 제일 작은 흰쌀 패키지와 김치를 사서 귀가했다. 평소라면 거뜬히 들 무게인데 그날따라 천근만근처럼 느꼈졌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마치고 저녁 준비를 하려는데 주방에서 내 쌀로 밥을 지어 내 김치로 볶음밥을 해 먹는 룸메이트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화가 치밀었다. 앞으로 내 물건에 허락 없이 손대지 말라고 언성을 높였다. 그 친구는 왜 사람이 깐깐하게 비즈니스적으로 구느냐고 오히려 나를 타박했다. 힘든 하루를 보냈고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저녁을 먹으며 휴식을 취하고 싶었는데 삼분의 일만 남은 쌀 패키지를 보니 짜증이 났고 허락 없이 남의 물건을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룸메이트 관념에 화가 났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잘 수 없었다. 왜 이런 생활을 하고 있는 거지? 수없이 되뇌었다.
혼자 살며 편한 생활을 할까? 하는 시점에 사람들에게서 배운 것들을 떠올려 본다. 이렇게 저렇게 지난 8년간 룸메이트 생활을 하며 60여 명이 넘는 친구들과 살았다. 한국인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 지내며 모났던 내 성격은 둥글둥글 해졌고 맹했던 성격에 눈치가 붙었고 어떤 상황에서도 내 의견을 정확하게 어필하는 능력이 생겼다. 물론 맨해튼의 높은 집값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도 룸메이트 생활을 하는 이유 중의 하나였지만 사람들 속에서 부딪치며 성장하는 내 모습이 마음이 든 것이 더 컸던 거 같다.
주위 환경이 윤택하면 배움의 길이 차단되기도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내 주위를 둘러봐도 조금 부족한 환경에서 성장한 친구들이 삶에 더 노련하고 빨리 세상 물정에 눈을 뜨고 인간관계에 대한 융통성이 높다.
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오늘도 새벽 3시에 라면을 끓이는 룸메이트를 타박하러 침대에서 내려와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