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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늙기 연습

환갑

by UrsusHomo


f28fb110d7b61.jpg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환갑잔치. 혜경궁 홍씨는 이 환갑상을 받고 난 후에도 21년을 더 살았다. 혜경궁 홍씨의 환갑잔치를 그린 '봉수당진찬도'의 일부분.


환갑. 소란스러운 일은 일절 없었다. 평소의 생일날에 하던 몇 가지를 했다. 케이크가 왔고 외식을 했으며 가볍게 술 몇 잔. 가족 이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가족 이외 누구도 내 환갑을 알지 못했다. 한두 해가 지난 뒤에야 우연히 알게 된 사람들은 '환갑이 지났다고?' 하며 놀라는 척을 했다. 마치 없었던 일처럼 환갑은 그렇게 지나갔다. 특별한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다.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것 자체를 알지 못했다. 알린다는 것 자체가 겸연쩍었다.


나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실제로 환갑이라는 말은 이제 거의 사어에 가까워졌다. 무엇보다 기대수명이 늘어났다. 1970년대까지 60세 안팎이었던 기대수명은 이제 80세를 넘었고 그러니 60세 정도는 그저 예사로운 생일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러나 막상 사회 지표를 보면 '환갑'은 엄연히 큰 변화의 기점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환갑을 넘기면 경제활동 참가율이 남자는 49%대, 여성은 26%대로 뚝 떨어진다. '환갑'은 분명히 살아있는 셈이다.


직업 특성상 나의 경제활동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나는 환갑에 대해서 각별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해, 누군가는 나의 환갑을 알고 있었다.


"회비 면제와 관련하여 안내드립니다.

만 60세 이상의 회원은 회비 면제 대상입니다."


내가 속해있는 단체에서 온 메일이었다. 단체는 회원들의 권리를 관리하고 운영을 위해 회비를 받는데 이제 그 회비를 면제해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환갑'이라는 사건이 나에게도 일어나긴 일어난 셈이었다. 내가 모르는 척한다고 해서 환갑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면제받는 건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환갑을 넘기면서 국민연금 의무가입 납입에서도 해제됐다. 65세가 되면 면제는 더 전면적이다. 지하철 요금, 그리고 몇몇 관광지나 기관의 입장도 무료다. 건강 관련 쪽으로 가면 혜택은 더 많아진다. 나는 그것들을 다 알지 못한다. 죽은 날까지 모른 채 살다가는 것들이 많을 것이다.


그즈음 인구 문제와 관련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던 후배와 식사를 했다. 고령화 문제와 국민연금 고갈과 사회적 부담 등에 대한 개탄을 길게 들었다. 놀랍게도 내가 내 환갑을 가장 각별하게 느낀 건 그 순간이었다. '아, 나는 이제 이 문제적 계층에 속하는구나.' 인구 피라미드 모양은 점점 역삼각형 모양으로 변해가고 있다.


내가 내 생계비를 국가로부터 지원받는 일은 없겠지만, 어떻든 나는 원하든 원치 않든 유형무형의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내 세대가 갑자기 죄인이 된 것 같았다. 나는 겨우 농담을 한마디 했을 뿐이다. "나는 몇 년째 도에서 지정한 성실납세자야." 그래서 나는 늙을 권리가 생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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