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소녀였을 적에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 암산리

by HeyHej
이천5.jpg 손바닥만한 작은 흑백사진 속 단발머리 중학생인 엄마(왼쪽)



"아이고, 언니 주민번호 때문에 너무 헷갈려!"

엄마의 카카오뱅크 계좌를 만들어 주던 막내 이모에게 의외의 복병이 찾아왔으니 그건 바로 엄마의 실제 생일과 일치하지 않는 주민번호였다. 모처럼 자매가 만난 날, 막내 이모는 '연로하신' 큰 언니만 카카오뱅크 계좌가 없어 자매 모임 회비를 걷을 수가 없으니 만난 김에 직접 계좌를 만들어주겠노라 호기롭게 나선 참이었다. 무려 8남매의 막내인 이모는 첫째 언니인 엄마보다 스무살 가까이 어리고, 맏조카인 우리 언니보다 고작 여덟살 많다.


주민번호를 입력해서 본인 확인을 하는 와중에 자꾸 오류가 뜬다. 이모는 별 생각 없이 엄마의 실제 생일을 입력하는데 시스템에서는 그런 주민번호를 가진 사람이 없다고 하는 식이다.

"아, 맞다. 주민번호가 생일이랑 다르지, 또 틀리게 입력했네."

1953년 음력 8월에 태어난 엄마는 영아사망률이 높던 그 시절 많은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태어나자 마자 제 생일로 호적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추석을 며칠 앞둔 음력 8월은 시골에선 한참 바쁜 농번기였기 때문에 멀리 읍내에 나가 출생신고를 하는 것은 한가한 겨울이나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엄마의 공식적인 출생일은 1954년 12월의 어느 날로 기록되었고 돌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엄마는 '이 세상 사람'이 되었다.


지금 외가 친척들이 살고 있는 곳은 인천이지만 엄마가 나고 자란 곳은 경기도 이천이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이천은 쌀농사를 많이 짓는 곳이다. 쌀농사를 크게 지은 덕분에 이천에 살 때 까지만 해도 엄마는 먹을 걱정 없이 살았다고 했다. 그 시절에 배 곯지 않고 끼니를 챙길 정도면 살림살이가 괜찮은 축에 속했다. 엄마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외할아버지가 타고 가던 트럭이 시골길에 구르면서 언제까지나 꽃길일 것만 같던 엄마의 인생도 자갈길 마냥 덜컹 거리기 시작했다. 3남5녀 중에 장녀. 위로 오빠 한 명, 그리고 엄마였다. 남동생이고 여동생이 엄마 아래 줄줄이었다.


할아버지가 허리를 다쳐 몸져누우시면서 농사를 해낼 일손이 딸렸다. 벼농사에는 장정들의 손이 많이 필요한 법인데 아들이래봤자 장남 빼고 나머지 자식들은 이제 고작 국민학생 정도의 어린 아이들이었다. 땅이 있어도 농사를 짓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판단한 외조부모님은 울며 겨자먹기로 시골 땅을 정리하고 큰 도시로 나가기로 결심하셨다. 선산이며 농사 짓던 땅 전부를 곁에 살던 이웃들에게 거저 나눠 주다시피 하셨단다. 변변치 않은 살림에, 모두가 처음인 도시 생활은 팍팍할 수 밖에 없었다. 할아버지가 직장 생활을 할 수 있던 것도 아니었고, 자식들이 다 커서 돈벌이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밑천이 될 만한 기술이 있는 것도, 딱히 기댈만한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처음 인천으로 이사올 땐 시골에서 농사지어놨던 쌀 포대를 몇 개 실어가지고 왔으니 동네 사람들은 우리가 아주 부자인 줄 알았던 거야. 그런데 그 쌀을 다 먹고 나니 먹을 것이 하나도 없더라."

식구가 많은 것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을 때나 재산이 되었다. 도시에서 식구가 많은 건 그저 먹을 입이 너무 많은 것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런 엄마의 얘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가만, 그러고보니 나의 엄마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엄마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취향 같은 것도 세세하게 알지 못하는 것 같다. 학교 수업 시간에 우리 식구가 좋아하는 걸 쓰라고 했더니 <엄마는 떡볶이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좋아한다>고 적어온 내 아이가 나보다 나은 것 같다. 나더러 적어보라고 했다면, 나는 과연 뭐라고 했을까?


엄마는 '옛날 얘기'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이다. 아빠의 고향집은 명절마다 갔었고 드라마틱한 그 인생 역경 스토리는 어릴 적 부터 귀에 딱지가 앉게 많이 들어서 그 시절에 나도 함께 살았나 싶을 정도로 머릿 속에 그림이 그려지는 듯 한데, 그에 반해서 엄마는? 어디서 태어나고 어떤 집에 살았지? 엄마의 어린 시절 친구들은 누굴까? 그리고 왜 인천으로 이사를 가게 됐지? 엄마의 젊은 시절은 어땠을까?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어릴 땐 엄마도 나처럼 학교에 다니고 친구들이 있고 꿈 많은 소녀였을 거란 생각을 아예 하지 못했다. 엄마는 태어날 때 부터 '엄마'인 줄 알았으니까.


엄마라고 왜 추억이 없을까. 그저 미루어 짐작 해 볼 뿐이다. 먹고 살기 힘들던 그 시절을 엄마는 두뇌의 저장 공간 가운데 가장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어둔 채 지내왔구나. 즐거웠던 기억들을 가장 앞쪽에 그러 모아 놓고 하루하루를 살아내었겠구나. 그렇게 엄마는 ‘옛날 얘기 해서 뭐하니, 오늘이 중요하지.’ 주의로 살게 되었는지 모른다. 엄마는 남에게 아쉬운 소리, 싫은 내색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니 더 그러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잊고 싶을 정도로 싫은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는데 나는 반대로 기억이 흐릿해지는 쪽이다. 잊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어느 순간 '그게 뭐였더라?' 기억조차 나지 않는데, 일종의 방어기제일 것이다. 이래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어쩌면 이런 것도 엄마를 닮은 게 아닐까.


몇해 전, 엄마의 칠순 생신을 겸해 가족 여행을 기획했다. 강원도 정선에 다녀오면서 이천에 들러 특별히 엄마의 고향집을 다함께 찾아가 봤다. 이제는 엄마의 가족이나 친척 그 누구도 사는 이가 없고 딱히 이 근방을 지날 일도, 다시 가 볼 일도 없어 엄마는 성인이 되고선 딱히 고향 마을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20년 전 쯤엔가 바로 아랫 동생인 이모와 함께 가봤지만 그 때 기억도 이제 가물가물해서 집 자리가 어디였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핸드폰 뒀다 뭐해? 사진이라도 좀 찍어놓지 그랬어?!"

무심코 타박하다 깨달았다. 지금처럼 당연하게 스마트폰을 사용하던 때가 아니었다는 걸.


지금도 보기 드물게 외진 한적한 시골 마을.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어디가 어디인지 잘 모르겠다는 엄마의 말에 아빠, 언니, 나, 남편, 아이들까지 마을 구석구석을 뒤졌다. 그러다 운 좋게 엄마 어린 시절 이웃이던 동네 아저씨를 만나 집터를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이천2.jpg "우리 집이 어디에 있었더라..." 할머니가 된 엄마의 어린 시절 집터를 찾아서.


"그래, 버스에서 내려서 저 고개를 넘어서 집에 갔지. 네 엄마의 할머니께 인사드리러 갔었어. 여기가 그 때 그 처가 자리네."

집터를 찾은 아빠의 얼굴이 20대 젊은 '정 서방'으로 돌아갔다. 꽤 컸다던 집은 흔적도 없고 지금은 어느 집의 텃밭이 되어버린 집터를 찾아내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보았다, 허전함과 설렘이 동시에 어린 엄마의 얼굴을.


"아침 일찍 마당에 나오면 잠자리가 요롷게 앉아있어. 이슬을 맞으면 날개가 무거워서 잘 못 날거든? 그러면 그 잠자리를 쏘옥 잡아서 몇 번 들여다 보다가 날려보내줬지!"

지금 내 아이만 했을 작은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간 엄마가 들려주는 얘기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이 곳에 살던 시절의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천1.jpg 한참 만에 찾아낸 집터. 옛날 모습은 간 데 없고 지금은 어느 집의 텃밭으로 변해 있었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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