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고향이란 무엇일까. 태어난 곳일까,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일까, 인생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일까, 물리적으로 머물지 않아도 마음이 가는 곳일까. 나는 지금의 시흥시- 당시에는 시흥군 소래읍 신천리라 불리던 곳-에서 태어났다. 엄마 아빠가 사글세방만 전전하다 결혼 후 처음으로 내집 마련에 성공한 곳이다. 그러다 다섯살이 되던 해, 아빠가 다니던 회사의 사업장이 경주에 생기면서 경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고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서울에 가게 됐다.
경상도에 아무런 연고도 없었던데다 줄곧 본사에서 이주한 사원 가족들이 모인 아파트에 살았던 탓에 경주에 오래 살았어도 사투리가 입에 붙지 않았다. 어쩌다 친구들이랑 어울리면서 사투리 같은 말이 입 밖으로 나올라치면, 좀 우스운 얘기지만 엄마가 싫어하셨다. "경상도 말 쓰지 마. 곧 다시 올라 갈 거니까." 라고 한동안 엄마는 얘기했었다. 줄곧 우리가 살던 곳도 딱히 도시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경상도에 처음 살아 본 엄마는 경상도야 말로 진짜 시골이라고 생각했다. 젊은 엄마는 그 때 큰 애가 국민학교를 졸업하면 당연히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고 한다. 남편 하나 믿고 낯설고 물 설은 곳에 살려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첨언하자면, 부모님은 아직까지 경주에 계신다. 경주에 산 햇수만 40년 가까이 되는 셈이다!
학창시절엔 친구들은 나를 '서울 사람'이라고 했다. 내 고향은 신천리지만 친구들에게 이게 어디에 있는 동네인지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투리도 안쓰고 저 어디 윗 지방에서 왔다고 하니 그냥 서울인가 보다 대충 그렇게들 생각했다. (경상도 사투리를 안 쓰는 사람 = 서울 사람의 공식이라니. 이 얼마나 단순한 친구들인가!) 실제로 나는 그 때까지 서울에 가본 적이 없었다. 스무살, 대학에 진학해 학과 사람들에게 내 소개를 했더니 경주에서 왔다며 '경주 사람'이라고 했다. (언제는 서울사람이라더니 이제는 경주 사람이래!) 스무살 이후로 근 20년을 서울에서 살다가 파주로 이사를 오니, 옆집 아주머니는 나를 '서울에서 온 새댁'이라고 부르셨다. 몇해 전 코로나 시국에 국립 경주박물관에 아이를 데리고 갔더니 입장 게이트 옆에 주소지와 연락처를 적으라는 안내문이 있었다.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하면 동선을 파악하고 비슷한 시간대에 함께 입장했던 사람들에게 검사 안내 연락을 하던 때였다. 주소에 경기도 파주시라고 적었더니 안내원께서 말씀하셨다.
"아이고, 멀리서 오셨네요, '파주 분'이 오셨네!"
안양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살던 부모님은 언니를 낳고 시흥시로 이사를 했다. 역시나 셋방살이였고 결혼생활 최대 과업인 내집 마련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주택부금을 털고 대출을 끌어 양옥 한 채를 샀다. 소래산 아래, 수인산업도로가 지나는, 포도밭이 지천이던 동네. 나는 기억나지 않지만, 언니는 주말이면 엄마 손을 잡고 부천까지 버스를 타고 나가 목욕탕을 다녔던 얘길 한다. 아직 중고등학생이던 외삼촌과 이모들이 학교 끝나면 인천에서 버스를 타고 우리 집에 놀러오곤 했다고 하니 근처 도시로 다니기는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시골마을이었나보다.
엄마는 어린 시절 고향집에서의 추억을 늘 마음에 품고 살았던 것 같다. 마당도 넓고 집 주변으로는 사방으로 들판이 펼쳐져 온갖 꽃과 나무를 사계절 눈에 담을 수 있는 곳. 줄곧 인천에 살다가 아빠와 결혼해 이 집 저 집 이사를 하면서도 이렇다할 마당이 있는 '내 집'을 가져본 적이 없던 엄마는 집이 생기면 마당을 가꾸고 싶었다. 그래서 비록 넓지는 않더라도 마음대로 나무를 심고 꽃을 가꿀 수 있는 마당이 있는 집을 바랐다. 엄마는 이사 하자 마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써야지 싶어 고이 간직해 왔던 딸의 돌반지를 털어 나무를 샀다.
돌 무렵부터 고작 다섯살까지 살았으니 집에 대한 기억이 그다지 많지는 않다. 그래도 비교적 선명한 기억은 역시 마당이다. 포도나무랑 앵두나무가 있던 마당. 여름이면 새벽에 몰래 현관문 열고 나가 잘 익은 빠알간 앵두를 따먹던 기억. 벌인 줄도 모르고 윙윙 날아다니는 게 재미있어 휙 손으로 잡았다가 손바닥에 따끔 쏘인 기억. 담장 아래에 엄마가 곱게 심어두었던 채송화. 그리고 집 뒷편으로 있던 소래산 아래 정겨운 놀이터와 그때만 해도 남아있던 빨래터의 기억. 어린 마음에도 나는 그 집이 무척 좋았다. 전형적인 80년대 양옥 스타일로 판에 찍어낸 듯이 비스무리하게 지붕 색깔만 달리 했던 여러 집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지만 내겐 '저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이었다. 꽃과 나무가 가득한 마당도 좋았고 언니를 따라 골목길에 나가면 옆집 오빠도 만나고 한 동네 사는 언니 친구들 집에 우르르 몰려가 소꿉놀이 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나이 차이가 다섯살이나 나는, 말 안 통하는 동생을 떼어놓고 언니는 늘 앞서 달려가곤 했다. 나는 어떻게든 언니 친구들 무리에 끼고 싶어 울면서도 언니를 쫓아갔다.
언제까지나 살 것 만 같던 집을 떠나 그 시절엔 생각도 못해봤을 먼 곳으로 이사를 하고 나서 다섯살 짜리 인생 처음으로 '그립다'는 감정을 느꼈다. 이사라는 건 집과의 이별일 뿐만 아니라 동네와의 이별, 이웃과의 이별, '시절'과의 이별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됐다. 내 나이 다섯살에.
그래서일까. 이제 내가 두 아이를 키우는 나이가 되고 보니 어린 시절 집에서의 추억이, 가족과의 추억이 커가면서 얼마나 내게 큰 자산이 되었는지를 새삼 느낀다.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서울의 아파트 생활을 접고 파주에 와 주택 살이를 하게 된 것도 그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이 집에서의 행복한 추억이 많은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별한 이벤트가 없더라도 '아, 우리 집에서 참 따뜻하고 재미있었지!' 자연스럽게 떠올리기를 바랐다. 아무래도 남자 아이들이다보니 부모의 품에서 더 일찍 떠날 것이고 그럴수록 집과 가족에 대한 추억이 많은 아이로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최근에 아이들과 함께 신천리에 가 봤다. <서해선> 열차 노선이 개통하면서 바로 우리 동네인 <신천역>이 생긴 걸 알게 됐다. 여행하는 마음으로 열차를 타고 갔더니 생각보다 너무 가까워서 깜짝 놀랐다. 40년이 걸려 찾은 그 동네가 딱 40분 거리에 있었다! 무엇보다 이제 여기는 신천동이다, 신천리가 아니라. 내가 살던 당시의 주택단지들은 모두 사라지고 빌라 촌으로 변해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택지 구획은 그대로여서 집 위치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가는 시대에 이 곳이 아파트 단지로 재건축 되지 않은 게 불행 중 다행이랄까. (여기 살고 계시는 주민 분들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죽 경사진 길을 따라 올라오면 우리 집이 있었어. 맞아! 여기 이 코너가 우리 집 자리였어. 이 쪽에 대문이 있었는데."
우리 집이 있던 자리에는 1층에 수퍼마켓이 있는 다세대 빌라가 들어서 있다. 골목길을 조금 더 가면 놀이터겸 어르신들 쉼터가 있는데, 아마도 내가 놀던 그 놀이터 자리가 맞을 것 같다. 언니 말로는 그 놀이터 윗쪽으로 소래산 바로 아래 사슴이며 토끼를 키우는 집이 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그런 집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언니가 3학년까지 다녔던 소래국민학교, 지금의 소래초등학교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소래'라는 말이 너무 어려워서 1학년 입학하던 언니가 '서울의 국민학교'인 줄 알았다던 그 학교.
집 터 앞에서 아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상에, 그 동네 앞에 전철 역이 생겼다고? 어머나. 정말 신기하네. 거긴 어떻게 변했니?"
이곳에 당신들의 젊은 날을 묻어둔 부모님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 촉촉하게 들린 건 기분 탓이었을까.
그때 나는 몇 살이었고, 골목길에서 뭘 하고 놀았고, 여기엔 뭐가 있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재잘재잘 아이들에게 얘기를 들려주며 생각했다. 왜 어르신들이 그렇게 옛날 얘기를 하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고. 수십년 전 어린 시절이 눈 앞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 같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