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인왕동 <첨성대>
시작은 단 한 번의 거짓말, 그것 뿐이었다.
중학교 1학년 어느 가을날, 가을 소풍 겸 교내 백일장이 열렸다. 학교에선 해마다 가을이면 축제를 열었는데, 축제의 핵심은 '시화전'이었다. 학생들이 잘 쓴 시를 골라 전문 업체에 의뢰해 엇비슷한 풍경화 같은 바탕 그림에 시를 얹고 액자를 만들어서 강당에 전시하는 것이었다. 때로는 축제 기간에 연주회나 무용 발표회가 함께 열리기도 했다. 그 시화전에 전시될 작품을 뽑기 위해서 백일장이 열린 것이다.
날씨도 화창하고 오랜만에 교복이 아닌 사복차림으로 야외에 나온 열네 살 소녀들은 백일장에 관심이 없었다. 근방의 학교가 대개 날짜를 맞춰 소풍을 가곤 했기 때문에 어느 남자 중학교는 어디로 갔다더라, 소풍 끝나고 시내 노래방에나 한 번 가보자, 뭐 이런 궁리를 하면서 도시락을 까먹느라 바쁘기만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작품을 낼 시간이 다가왔다. 그제야 마음이 급해졌다. 대체 뭘 쓰란 말이냐. 시가 뭔데...??
학교에서 내 준 주제어가 몇 개 있었을텐데 아마도 가을, 경주, 첨성대, 불국사 이런 단어들이었던 것 같다. 과제를 내야 집에 갈 수 있었으니 마음이 급해졌다. 도저히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는데 옆에 앉은 친구 M이 말했다.
"야, 빨리 써라. 아니면... 내가 두 개 썼는데, 니 하나 할래?"
세상에, 이렇게 고마울 데가!!! 얘가 이렇게나 부지런했었나? M은 어쩐 일로 시를 두 편이나 지었다면서 남는 걸 하나 주겠다고 했다. 대충 이름이나 빨리 써서 내고 놀러나 가자며. 나야 당연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시의 제목은 <첨성대>. 작성자의 이름은 <정혜린>.
그렇게 그 날의 소풍 겸 백일장은 끝났고 이제 버스를 타고 시내로 출동하기만 하면 되었다.
국어 담당 선생님은 50대 정도의 여자분이었는데 무섭기로는 학생 주임보다 더 유명했다. 숙제나 시험 점수에도 엄격했지만 평소에 교복 넥타이가 조금이라도 비뚤거나 책상이 지저분한 것도 그대로 지나치지 않는 꼼꼼한 분이었다. 드르륵. 여느 국어시간과 마찬가지로 선생님이 앞문을 열기가 무섭게 교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정혜린!"
수업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 무서운 선생님의 입에서 내 이름이 튀어나왔다.
'아까 복도에서 뛰어다닌 걸 선생님이 보셨나? 아니면, 교복에 뭐가 묻었나? 숙제는 다 했는데...?'
"자, 다들 박수! 1학년 8반 정혜린이가 지난번 백일장에서 장원으로 뽑혔다. 뭐하노, 박수 안 치고!!“
"예에? 백, 백일장, 장원...이오?"
"혜린아, 니 작문에 소질 있는 줄 몰랐는데, 우째 그래 잘 썼노? 교무실에서도 선생님들이 다 칭찬하시더라."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일이 벌어졌다. 친구들이 와 하며 손뼉쳤다. 너무 놀라 M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 M의 입도 내 입 만큼이나 벌어져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아니, 어쩌면 좋을까. 국어 시간이 끝나도록 벌렁벌렁한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나는 지난 백일장에 뭘 써냈는지도 모르겠는데 장원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M과 나를 비롯해 이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는 서넛의 친구들이 머리를 맞댔다. 우선 사실대로 밝혀야 했다. 장원은 내가 아니라 M이 받아야 한다고. 내가 쓴 것이 아니라고. 그래. 그런데... 이걸 어떻게 밝히느냐가 문제였다. 선생님은 너무 무섭다. 혼나는 건 더 무섭다. 용기를 내기에는 무서운게 너무 많은, 고작 열네 살이었다. M이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다, 혜린아. 그냥 니가 한 걸로 하고 넘어가자. 이거 얘기하면 니도 혼나고 내도 혼나고 우리 다 혼날게 뻔하다. 나는 선생님한테 말 몬한다. 대신에 니가 맛있는거 함 쏘면 되잖아. 됐제?"
이렇게까지 쿨하게 나오다니. 양심은 죄책감에 방망이질 쳤지만 원작자가 허락했다. 우리 무리의 친구들도 모두 동의했다. 그날 오후, 경주에 하나밖에 없는 롯데리아에서 햄버거와 감자튀김과 콜라를 거하게 샀다. 시를 산 값을 치르는 자리였고 장원이 된 기념 턱이었고 우리 모두 입단속을 하자는 굳은 거래의 의미이기도 했다.
"우리 모두 한 배를 탄 거야."
거금을 쓰고 이 사건은 이렇게 무마되는 듯 했다.
백일장에서 장원을 받은 덕에 나는 처음으로 전교생이 모인 조회 시간에 단상에 올라가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상장을 받았다.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지만 많은 사람 앞에 나와 박수를 받으니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니, 솔직히 조금 우쭐했던 것 같다. '잘난 사람' 대접 받는 게 이런 기분일까. 집에서는 '우리 딸이 이렇게 작문에 재능이 있는 줄 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며 작은 딸을 신통방통해 하셨다. 어쨌거나 상장도 받았고, 곧 열릴 시화전에 액자만 걸면 되겠구나 하던 어느 날, 국어 선생님이 교무실로 부르셨다.
"혜린아, 이번에 예술제 때 장원 작품으로 시 낭송회를 할라카거든. 니가 장원이니까 무대에 올라가서 시를 외워서 낭송하고 2학년 선배가 피아노로 반주 쳐 주고, 뭐 그래 하기로 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제?"
"네, 네?? 시.. 낭송이라고요? 사람들 앞에서요???"
장원인 ‘척'하는 일은 상장을 받았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었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시 낭송회는 전교생은 물론이고 학부모, 다른 학교 학생, 외부 손님들이 모두 참석하는 행사란다. 국어 선생님이 기획한 야심찬 프로그램이고 이런 행사는 처음이라 교장, 교감 선생님도 무척 기대하고 계신다고도 했다. 강당 무대에 나 혼자 올라서 그 큰일을 어찌 해내나... 눈 앞이 캄캄해졌다. 선생님은 그 길로 음악실로 가자고 하셨다. 피아노 연주자로 2학년 선배를 불러놨다며 어떤 음악으로 할지 정하고 인사도 나누라는 것이었다. 하필 선생님이 섭외하셨다는 그 선배는 초등학교 때부터 안면이 있는 동네 언니였는데 소위 말해 '조금 노는 부류'여서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 마저도 무섭게 느껴졌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이것만은 도저히, 도저히... 안된다. 막아야 한다. 거짓말 한 번 잘못해서 정말 큰일이 나는구나 싶어 덜컥 겁이 났다. 내 거짓말을 선생님, 엄마, 아빠가 다 알게 되실까 걱정됐다.
"선생님, 저는... 저는... 엉엉... 못하겠어요. 사람들 앞에 서는 것도 못하겠구요... 엉엉엉... 이런 거 해 본 적도 없고... 엉엉.... 시도 잘 못 쓰는데... 엉엉엉..."
입을 열었더니 저절로 울음이 터져나왔다. 고해소에 들어간 것 마냥 그동안의 모든 잘못한 일들이 떠올라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모든 게 거짓말이었다고 털어놓는 것 마저도 무서워져 그저 두려움에 울고 있는데 이게 웬일인가. 그 무서운 선생님이 나를 꼬옥 안아주시면서 어깨를 토닥여 주시는 게 아닌가.
"혜린아, 무대가 너무 커서 무섭나. 괜찮다. 괜찮다. 잘할 수 있다. 연습하면 되는 기다. 잘 할 수 있다."
세상에 들어본 적 없는 인자한 목소리. 이것은 천상의 목소리인가, 천사의 음성인가.
그 때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 있다.
첫째, 이 호랑이 선생님에게도 이렇게 따뜻한 면이 있구나 하는 것.
둘째, '평소에 잘 하라'는 말이 이럴 때 쓰이는구나 하는 것.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사실 나는 평소에 성적이 나쁘지 않은 편에 속했고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지냈는데 그래서인지 선생님이 나를 정말로 글 잘 쓰는 착실한 학생 정도로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나를 별 의심 없이 철석같이 믿고 계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선생님, 지금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고 계신 거예요, 아주 제대로.
선생님의 다정한 위로를 받고 보니 못하겠다는 말을 더는 할 수가 없었다.
"네.... 연습... 해 볼 게요."
휴... 이러려고 한 건 아닌데. 뭔가 내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내가 짓지도 않은 시였지만 밤낮으로 들여다보고 외우고 했더니 이젠 정말 내가 썼나 싶은 착각이 들게 눈을 감고도 읊어댈 수 있을 정도가 됐다. M도 말했다.
"야, 이 시는 이제 진짜로 니가 쓴기다. 내는 이 시 기억도 안난다. "
기왕 이렇게 된 거 잘 해 보자. 나는 뻔뻔해지기로 했다.
'그래, 이것은 내가 쓴 시이다. 이것은 내가 쓴 시이다. 나는 잘 할 수 있다. 나는 잘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고!!!'
마치 주문을 외듯 나 자신을 세뇌하고 연습에 매진했다. 이제와 거짓말을 돌이킬 수는 없으니 창피를 당하지 않으려면 무조건 '잘' 끝내야만 했다.
드디어 대망의 시낭송회 날.
"첨. 성. 대."
제목만으로도 참 경주다운 이 시에 관객들은 아낌없이 손뼉을 쳐 주었고 꽃다발을 들고 오신 부모님은 딸이 자랑스러워 한껏 상기된 표정이었다. 이 무대의 기획자이자 책임자인 국어선생님도 만족해하셨다. 친구들도 잘했다고 축하해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시낭송회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한 숨 돌렸다. 이제 정말 모든 게 끝이다. 발 뻗고 잘 수 있겠다!
열네 살의 가을이 길기만 했다. 마음은 불이 났다가 얼어붙었다가 사계절을 몇 번이나 보내는 느낌인데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시 낭송회 이후로 국어 선생님은 한층 더 나를 친근하게 대해주셨다. 나도 선생님이 꽤 친해졌다고 느껴져서 더는 선생님이 무섭지도 않았고 다른 선생님들도 뭔가 나를 우등생 대접해 주셨기 때문에 학교 생활은 편해졌다. 가끔 저 잘난 1학년 짜리가 나댄다고 아니꼬워하는 2,3학년 선배들도 있었지만 그만큼 학교 안에서는 유명인사가 된 셈이었다.
그러던 어느 국어 시간, 나는 또 한 번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