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구좌읍 월정리
장소가 사람으로 기억된다는 것은 기쁘기도, 때로는 슬프기도 한 일이다. 어딘가에 갈 때마다 그 사람이 떠올라 행복하다면 그 곳이 사랑스러워진다. 상대방이 나를 떠올리며 어떤 장소를 행복한 곳으로 추억해 준다면 그것 또한 고마운 일이다. 반대로 근처에라도 갈라치면 그 사람이 떠올라서 숨이 쉬어지지 않고, 머릿속이 멍해지는 것만큼 슬픈 일도 없다. 그 사람이 떠남과 동시에 그곳에 얽혀있던 나의 추억도 함께 떠나보내야 하는 아쉬움이 생겨난다.
제주. 그곳을 떠올릴 때 빠뜨릴 수 없는 한 사람이 있다. 전에 사귀었던 남자. a.k.a. 구.남.친.
생애 처음으로 나를 제주에 발 딛게 만든 사람.
스물아홉 살의 가을. 5개월 남짓 연애를 해 오던 무렵 그가 제안했다. 함께 제주 여행을 떠나자고. 그때까지 나는 가깝게는 일본과 중국을, 멀리는 유렵과 호주 등지를 겁도 없이 쏘아 다녔으면서도 비행기를 타고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섬인 제주도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상태였다. 여고 시절 수학여행을 제주도로 갈 뻔 했지만 안타깝게도 IMF 사태가 터지면서 그러지 못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직장인이 되어서도 어쩐지 제주도와는 연이 닿질 않았다.
제주에 올레길이 생기고 저비용 항공이 하나둘 취항해 제주로의 배낭 여행 붐이 일어난 게 오래 되지 않은 시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제주도=한라산 정도로 알고 있던 나와 달리 그는 벌써 몇 해 전부터 홀로 제주를 여행하며 스쿠터를 타고 해안 일주를 하기도 했고 국토 최남단인 마라도에 가보기도 했으며 '고사리장마'라는 제주만의 용어를 알고 있었다. 여러모로 지식이 풍부한 그를 믿고 별 계획 없이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긴, 연애 5개월 차의 알콩달콩한 연인에게 여행 계획 따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딜 가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어디든 '함께'하는 것이 중요했을 뿐이다.
주말을 이용해 2박3일 짧은 일정으로 제주에 도착해 자동차를 빌렸고 옆자리에 그를 태웠다. 스무살에 운전면허를 땄다는 그는 '장롱면허'였고 나는 서울시내에서 자가 운전으로 출퇴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통 우리의 데이트에서 기동성은 나의 몫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곳이라며 데려간 바다는 정말로 좋았고, 맛있다고 한 제주의 음식은 정말로 맛있었다. 그때 내가 마주했던 제주는 '그가 서 있는'제주, '그가 먹고 있는 흑돼지를 키워낸' 제주, '그가 바라보는 바다를 가진' 제주 였을 것이다. '그'라는 필터가 덧씌워진 제주의 모습을 나는 보았다. 우리가 함께 간 제주도가 좋았다.
그가 안내하는대로 중산간을 지나며 중간중간 차를 세우고 제주를 눈에 담았다. 사진으로만 봤던 한라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웠고, 어디까지가 바다고 어디부터 하늘인지 경계가 불분명한 푸르디 푸른 수평선이 있었다. 내가 가보고 싶어 한 녹차밭에 들러 녹차 아이스크림과 녹차 롤케이크를 먹으며 땀을 식히고 중문으로 내려가 흑돼지를 구워 먹었다. 보통의 관광객처럼 주상절리의 신비한 지형에 감탄했고 성산일출봉을 바라보며 갈치조림을 먹었다.
여행하는 내내 그는 그간 자기가 여행해 온 제주를 내게 알려주기에 바빴다. 잘 곳을 정하지 못해 종교시설에 들어가 무작정 하룻밤을 청했다는 이야기며 비 내리는 밤 스쿠터의 헤드라이트가 고장나 말그대로 목숨을 걸고 해안도로를 달렸다는 얘기에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몇 번이나 '어머나!' '세상에!' '대단해!'를 연발했다. 홀로 어느 오름을 올랐을 때 느꼈던 벅찬 감정을 어찌나 생생하게 얘기하는지 마치 나도 그 오름을 같이 올랐었나 착각이 들 정도였다. 마르고 닳도록 제주를 찬양하는 그의 말처럼 2박3일은 제주를 여행하기에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그가 제주를 아는 것처럼 나도 제주를 더 많이 알고 싶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는 특히 제주의 동쪽이 좋다고 했다. 한국의 바다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맑고 푸른 에메랄드 빛 바다가 그곳에 있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애월이나 중문 쪽은 이미 관광객으로 북적였지만 동쪽 바다는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풍력발전기의 커다란 바람개비라 돌아가는 이국적인 풍경의 행원리를 지나 그의 안내로 도착한 곳은 <월정리>였다.
단단하고 평평한 백사장이 길게 펼쳐져 있고 시선이 내리꽂히는 저만치 앞에 바다와 하늘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조용한 바닷가를 따라 좁은 해안도로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카페가 딱 한 군데 있었다. 바다도 조용하고 그 바다를 끼고 있는 동네도 조용했다. 내 기억에 당시 월정리엔 그가 몇 해 전 스쿠터를 타고 와 묵었다던 게스트하우스와 바다를 마주보고 있는 한 동짜리 건물의 모텔, 그리고 아직 건물이 채 다 생기지도 않은 '아일랜드조르바'라는 카페 한 곳 뿐이었다.
해가 쨍쨍했던 전날과 달리 하필 흐리고 비바람이 불었다. 가뜩이나 조용한 마을에 날씨까지 궂어서 해안에 사람이라곤 우리 둘 밖에 없었다. 그런 한적한 곳에 카페가 있다는 게 이상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때 '아일랜드조르바'는 대문만 있고 막상 건물은 다 지어지지 않은 상태로 이름만 우선 '카페'라고 내걸고 있었다. 대문과 이어진 담장에 특이하게도 옆으로 기다란 직사각형의 창인지 구멍인지가 나 있었는데 담장 안쪽에 들어가 밖을 내다보니 그 네모난 구멍이 마치 액자처럼 월정리의 바다를 담고 있어서 신기하고도 재미있었다.
대문 앞에 비를 피해 겨우 둘이 자리에 앉아 히피 같은 주인이 아주 천천히 내려주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토스트 같은 걸 나눠 먹었다. 한참을 거기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다가 비바람이 점점 거세지면서 가게 앞에 내어져 있던 파라솔이 뒤집히는 걸 그가 간신히 붙잡아 접어주었다.
날씨는 험하고 그의 표현대로 반짝반짝 빛나는 에메랄드 같은 바다는 아니어서 아쉬웠지만 어쨌든 나는 좋았다. 그가 예쁜 바다라고 말해주었으니까. 그리고 그때 그 바다엔 오직 우리 뿐이었으니까. 그거면 충분했다. 그날 오후 비행기로 서울로 돌아왔고 후에 길고 긴 여운을 남긴 짧은 여행은 끝났다.
'첫 키스', '첫 만남'처럼 '첫'이라는 글자가 붙으면 그것은 이미 단순한 키스나 만남이 아니게 되는 것처럼 나의 '첫' 제주도 여행은 단순한 여행이 아닌 것으로 남았다. 무엇을 하든 행복한 순간들 뿐이었기 때문에 '혹시 신혼부부가 떠나는 허니문이란 게 이런 걸까?' 하는, 스물아홉 살의 성인이 하기엔 조금 유치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여행을 기점으로 앞으로 우리의 관계는 한층 더 굳건하게 발전할 것이란 생각이 깊어졌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나만 하고 있다는 걸 얼마 후에 알게 됐다. 희망찬 미래를 그리는 나와 반대로 그는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빠가 당신 한 번 보고 싶으시대. 언제 집에 같이 갈래?"
흔쾌히 이어질 줄 알았던 그의 대답이 뜨뜻미지근했다. 여행 이후로 그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눈치챘지만 짐짓 모른 체 했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 노랫말과 달리 내 감은 틀리길 바랐다. 여느 주말과 같았던 그 날, 흰 셔츠를 빼입고 나타난 그에게 물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무슨 말을 해도 놀라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고서.
"오늘 무슨 날이야? 웬일로 이렇게 빼입고 나왔어? 나한테 뭐 할 말 있어?"
"......"
"뭐야, 말해 봐. 설마 헤어지잔 얘긴 아니겠지?"
내 딴에는 생뚱맞은 질문이었는데, 그의 대답이 참으로 명료했다.
"응. 맞아."
'맞다고? 뭐가 맞다는 건데?'
생각보다 그는 너무나 덤덤했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얘길 해서 듣고 있는 나도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뒤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왜냐고 묻지 않았고 '싫다'고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