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의' 제주 (2)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

by HeyHej

"그래. 알았어. 그러자."


이미 그의 마음이 떠난 걸 확인한 마당에 이유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붙잡는 건 더욱 무의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한 것도 많고 묻고 싶은 것도 많고 원망도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사랑의 균형이 깨어져 버린 이상 나는 약자, 아니 패자가 되어 버렸다. 모든 자존심을 딱 한 번 내려놓고 매달리고 구걸해서라도 그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럴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려 깊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다. 가볍게 내린 결정이 아닐 것이다. 이별을 고할 때 그의 모습이 너무나 담담했으므로 그만큼 이별에 대한 확신이 굳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정말로 그런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 같았다. 이걸 어떻게 아는가 하면, 그와 나는 같은 공간에서 일하고 있었다. 젠장.




잊으려면 일차적으로 눈에서 멀어져야 하는데 같은 사무실, 같은 책상을 쓰고 있으니 싫어도 그의 얼굴을 날마다 보아야만 했다. 얼굴을 매일 보면서 마음은 멀어져야 하고, 또 멀어지고 있는 상대방을 내 눈으로 확인하려니 세상에 그것만큼 잔인한 일이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사무실에선 우리의 관계를 아무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평소처럼 그리고 기계처럼 출근하고 일했다. 슬퍼할 겨를 따위 없었다. 네가 뭐라고 하든 나는 정말로 괜찮다는 걸, 이렇게 괜찮은 여자를 차버렸으니 너야말로 멍청이 중에 똥멍청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처음엔 화도 나고 뭐 저런 놈이 다 있나 욕을 퍼붓기도 했다. 물론 마음 속으로만. 이별이란 단어를 입 밖에 꺼내는 순간 이별이 실감날까봐 두려웠다. 나는 아직도 이별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유예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어떤 날은 제주도에서의 행복했던 바로 얼마 전의 모습이 떠올라 온종일 다시 제주도에 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또 어떤 날은 혹시 여행 중에도 헤어질 궁리만 했던 걸까 그랬다면 정말 배신도 이런 배신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또 어떤 날은 할 수만 있다면 내 기억 속에서 제주도를, 그 곳에서의 추억을 깨끗이 벅벅 지워 버리고 싶었다.


그 놈의 제주도. 징글징글하다.




사무실 안에서 종종 그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나 전날 술을 마시진 않았을까(나 때문에).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지는 않나(나 때문에). 그런데 그는 나보다 더 괜찮아 보였다. 그래, 그렇다면 나도 괜찮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평소와 마찬가지로 퇴근을 하던 어느 날, 피로에 찌든 몸으로 올림픽대로 한복판의 교통체증에 갇혀있을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노래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왈칵 울음이 터져버렸다.


빨래를 해야겠어요 오후엔 비가 올까요

그래도 상관은 없어요 괜찮아요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아요 그러면 나을까 싶어요

잠시라도 모두 잊을 수 있을지 몰라요

그게 참 맘처럼 쉽지가 않아서

그게 참 말처럼 되지가 않아서

무너진 가슴이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난 어떡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그대가 날 떠난 건지 내가 그댈 떠난 건지

일부러 기억을 흔들어 뒤섞어도

그새 또 앙금이 가라앉듯 다시금 선명해져요

-이적, <빨래> 중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처음이었다. 그동안 꾹꾹 눌러 담아 모아놨던 설움이 단번에 폭발했다. 한겨울 꽁꽁 언 강 위를 거침없이 걷다가 갑자기 바닥에 쫙쫙 금이 가는 것 같았다. 처음엔 한 쪽 발만 훅 빠지다가 눈 깜짝할 새에 주위 얼음들이 몽땅 깨져버려서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얼음물 속으로 빠져버리고 마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허우적대고 있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휑한 월정리의 바다가 내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집에 오자마자 바로 제주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1. 돌아오는 주말 아침 첫 비행기로 떠나 월정리로 향한다.

2. 게스트하우스든 모텔이든 방구석에 틀어박혀 일요일 저녁까지 실컷 책을 읽고 월정리 바다를 보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3. 그리고 그 후엔 정말로 정말로 깨끗이 그를 잊는다.


이것이 나의, 간단하지만 쉬울 것 같지는 않은 여행 계획이었다. 제주로의 첫 여행엔 계획이 없었지만, 이번 여행은 이렇게라도 계획을 세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단순한 계획조차도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비행기를 타려고 했던 그 주말이 다가오기 전에 우리는 만났고, 다시 연애를 이어갈 것을 두 손 맞잡고 눈물을 흘리며(!) 다짐했기 때문이다.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내 앞에 나타난 그를 나는 밀어낼 수가 없었다. 그동안 내가 힘들었다 괜찮기를 반복하면서 이별의 고통을 견뎌낸 것 이상으로 그도 아파하고 후회했다고 한다.


후에 알게된 사실인 즉, 애초에 본인은 결혼을 원하지 않는 사람인데 우리의 나이도 있고 나는 결혼을 원하는 것 같은 눈치라 더이상 이 만남을 지속하면 안될 것 같았다는, 이해가 될 것 같으면서도 말이 안 되는 것 같기도 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재회를 결심했을 땐 나와 안정적인 미래를 약속하겠다는 일종의 '자기 배신'을 감행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여기까지가 우리의 연애 이야기다.


지금껏 수십번을 곱씹어 봤지만 이때를 떠올리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 듯이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흐른다. 아낌없이 사랑을 주었기 때문에 후회는 없었지만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랑을 주고 싶었는데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다니 아쉬움이 가득했던 그 마음이 생생하다. 재미있는 장면은 다시 볼 때마다 웃음의 강도가 절반 이하로 확 줄어드는데 슬픔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슬픈 영화는 다시 봐도 슬프고, 같은 장면에서 매번 눈물이 나는 것 처럼 말이다.


그때의 제주 여행 이후 한바탕 큰 소란을 겪고 우리의 사랑은 더욱 단단해졌다. 얼마 후 그는 월정리로 다시 나를 데려가 맑은 하늘 아래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그 바다 앞에서 프러포즈를 했고, 그 다음엔 뱃속에 아기를 담고 월정리 바다를 찾았다. 아장아장 걷는 아이의 손을 잡고 월정리 해안을 걷기도 했고 또 그 후엔 둘째도 데려가 넷이서 바다를 한참 바라보기도 했다. 그렇다. '구남친'은 '현남편'이다. 지금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




그가 나에게 제주를 알려준 이후로 꽤 여러번 제주에 갔다. 가족, 친구와 가기도 했고 물론 그와 가기도 했다. 매번 계절도 달랐고 목적지도 달랐고 동행에 따라서 여행의 분위기도 달랐다. 당연히 갈 때마다 만나는 제주의 모습도 달랐다. 겨울의 더께가 아직 채 벗겨지지 않은 이른 봄의 제주, 초록이 무성한 한여름의 제주, 태풍이 몰아치기 전 늦여름의 제주, 모두 같은 곳이면서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같은 바다라도 갈 때마다 물빛이 달랐다.한 번 다녀올때마다 그와 함께 나눌 수 있는 제주의 이야기가 늘어갔다.


'구남친 현남편'에게 프러포즈를 받던 날은 유난히 맑고 햇빛이 눈부셨다. 그 날 알았다. 월정리의 바다가 이전에 그가 말한 것처럼 정말로 에메랄드 빛이라는 걸. 백사장은 더없이 희고 고운 모래로 가득하다는 걸. 이 아름다운 바다에서 멋진 추억을 만들었다는 게 가슴 벅차게 기뻤다. 그래서 제주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를 꼽으라면 단연 월정리다. 지금의 월정리는 이때와 비교하면 정말 같은 곳일까 할 정도로 낯선 상업시설이 많은 곳이 되었다. 허전할 정도로 텅 비었던 바닷가에 사람과 자동차가 가득하다. 호젓한 분위기가 아쉽긴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니 많은 사람이 몰리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으면서 또 같지 않은 사람인 것처럼 그 역시 변해가고 있을지 모른다.


이 평범한 진리를 나는 월정리를 통해 더 확실하게 깨닫는다. 제주를 아는 사람에게는 모두 각자의 제주가 있을 것이다. 나에게 제주=월정리 인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월정리'도 모두 똑같이 빠르게 변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그래도 여전히 변함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면 월정리는 그대로 월정리에 있다는 것이다.


차를 타고 지나는 길에 즉흥적으로 내려 편의점에서 모래놀이 장난감을 샀다. 곱디 고운 월정리의 모래는 꼬맹이들의 손을 거쳐 도로가 되었다가 오름이 되었다가 댐이 되었다. 올 때마다 휙휙 변해있는 월정리를 보고서 '서울 가서 성형 수술 받고 돌아와 예전 얼굴을 찾기 힘든, 고향의 첫사랑과도 같다'고 했던 남편이 말했다.


"우리가 결혼을 약속한 바다에서 우리의 아이들이 이렇게 재미나게 놀고 있네!"


아이들에게 이렇게 좋은 놀이터가 되어주었으니 이곳은 여전히 멋진 바다인 것이다. 어여쁜 월정리인 것이다.


“아빠가 얼마나 울고불고 엄마를 붙잡는지, 내가 불쌍해서 한 번 봐줬지. 엄마나 되니까 네 아빠같은 사람 받아준 거야." 하고 우리의 연애사를 아이에게 들려줄 수 있는 월정리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끝으로, 이별을 겪으며 '그놈의 제주 뭐가 좋다고...' 라고 생각했던 그 제주를 여전히 좋은 곳으로 추억하게 해 준 '그놈'에게 감사를 전한다.


검은 색에 가까울 정도로 진한 파랑, 캔디바 같은 청량한 민트 빛깔, 하늘보다 더 하늘같은 하늘색... 월정리 바다의 파란색은 다채롭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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