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적 없는 본적

경기도 안양시 박달동

by HeyHej

거짓말인 줄 알았다.


"네 언니가 태어나던 1977년도 7월에 비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 집이 떠내려가는 줄 알았다니까."


또 시작이셔.... 직접 겪은 일은 늘 과장돼서 기억에 남곤 하기 때문에 아빠의 저 말이 나는 늘 뻥튀기된 얘기라고만 생각했다. 해마다 언니 생일이면 늘 듣는 말, 1977년도 안양천 범람.


"엄마는 네 언니 낳으러 병원에 가고 아빠는 집에 물이 차서 그거 퍼내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나 몰라. 물을 하루 종일 퍼내는데도 이만치 차올랐다니까."


아빠는 명치 께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반지하 방 안에 물이 가득 찼다고 했다. 하늘에 구멍이 났는지 비가 말도 못 하게 퍼붓더라면서.


매해 연례행사처럼 듣던 말이, 정말인지 궁금해져 검색해 보고 깜짝 놀랐다.


아빠 엄마가 살던 안양의 한 반지하 셋방은 1977년 7월 안양시를 쑥대밭으로 만든 대홍수의 여파로 꼼짝없이 물에 잠겼다. 엄마가 언니를 낳던 5일에도 장마철이니 비가 계속 내렸을 것이고 당시 보도된 바에 따르면 8~9일 단 이틀 사이에 내린 비가 467.2mm로 기상청 창설 이래 최대의 강우량을 기록했다고 한다. 진짜로, 보통 물난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엄마와 언니는 병원에 누워있을 때였으니 아빠 홀로 가재도구를 하나라도 더 건져내려고 사투를 벌이고 있었을 것이다.


안양천을 끼고 있는 동네 경기도 안양시 박달동.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의 본적, 요즘은 법이 바뀌어 '등록기준지'라고 한다. 증명서를 뽑으면 본적(등록기준지)에 항상 적혀있는 이 주소가 나는 늘 궁금했다. 내가 태어난 곳도 아니고 단지 부모님이 잠깐 살았던 곳에 불과한 이곳이 왜 평생 나를 따라다니게 되었을까.

우선 본적이란 무엇인가.


[민속대백과사전에 의하면 본적本籍이란 호적의 기준이 되는 주소를 가리키는 말로, 출신지를 나타낸다. 구 호적법상 호적이 있는 장소로 같은 집안[家]에 속한 사람은 본적을 달리할 수 없다. 호적법이 폐지되지 않았을 때 호적에는 반드시 호적의 기준이 되는 장소인 본적이 기재되어야 하였다. 본적은 한 개인 혹은 한 개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등이 대대로 살아온 고향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고, 출신 지역을 확인하는 기준이 되는 특수한 역사·사회적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전적轉籍과 분가 자유 및 이전 자유가 인정되면서 본적의 전통적 의의가 쇠퇴하고 있다.


본적은 〈호적법〉이 폐지되고 2008년에 〈가족관계등록법〉이 시행되면서 등록기준지가 되었다. 〈가족관계등록법〉의 등록기준지는 가족이 호주의 본적을 따라야 하고, 호주만이 본적을 변경할 권한이 있었던 〈호적법〉의 본적과 달리 개인별로 결정하고 자유롭게 변경할 수 있다. 본래 본적지는 거주지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계로 이어지는 친족 질서에 의해 자손들은 아버지의 본적을 그대로 물려받게 되었고, 이에 따라 조상들이 살던 고향을 떠난 출향인들은 거주지와 본적지가 일치하지 않게 되어 본적은 시조의 고향이란 의미 정도로 사용하게 되었다.]


아이를 낳고 출생신고를 할 때 남편과 함께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등록기준지를 어디로 적어 넣어야 하지...?'


아기를 낳고 이름 어떻게 지을까만 고민했지 등록기준지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남편의 본적으로 올리자니 남편도 어딘지 잘 모르는 장소인 것 같아 별로였고 내 본적은 나도 모르는 곳이니 제외. 그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 태어난 우리 아기가 살게 될 집으로 하면 되겠다! 나중에 커서 다른 곳에 살게 되더라도 '여기가 진짜 내 고향집!' 할 수 있는 곳으로. 해서 당시에 살던 집(결혼하고 첫 집이었으니 '신혼집') 주소를 또박또박 적어 넣었다.


아마 부모님도 그랬을 것이다. 첫 아이를 낳고 키운 그곳이 우리 자매의 본적지가 된 것이다.


언니도 갓난아기 때 잠깐 살았던 곳이라 어딘지 잘 모른다고 하기에 궁금해서 한 번 다녀와봤다!

이름하여 <가본 적 없는 본적 가보기>


1977년 대홍수가 재연되는 줄 알았다. 어쩜 이렇게 비가 쏟아진담?! 천둥번개가 하도 요란해서, ‘드라마처럼 번개 한 번 맞고 그시절로 돌아가는 거 아냐?’ 상상해봤다:)


사실 거리상으로는 멀지 않아서 금방 갈 줄 알았는데 주말 교통체증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나 보다. 심지어 9월이었는데도 한여름 장대비처럼 폭우가 쏟아지다 말다 반복하는 바람에 예상시간을 훌쩍 넘겨서 박달동에 도착했다. 주차를 하고 보니 왜 아빠 말씀처럼 홍수가 났는지 알 것 같았다. 안양천과는 작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리 집이 있었는데 안양천보다 지대가 낮았다. 또 당시에는 지금처럼 제방이 튼튼하고 높게 지어지지 않았을 테니 강물이 한 번 흘러넘치면 물바다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본적 주소지에는 지금은 1층에 삼계탕집이 있는 작은 상가건물이 들어서 있고 (그러고 보니 신천리 내 고향집과 비슷하다) 엇비슷하게 생긴 빌라들만 가득한 조용한 주택가다.


이곳에서 젊은, 아니 지금의 나보다도 훨씬 어렸던 20대의 아빠 엄마가 첫아기를 낳고 살았다니. 귀엽기도 하고 어딘가 애틋하기도 하다. 당시에는 전세니 월세니 계약의 개념이 지금하고 또 달라서 계약서를 6개월 단위로 쓰는 곳이 많았다고 한다. 방세 내기 빠듯한 젊은이들은 1년에도 몇 번씩이나 이사 보따리를 싸야 했다는 얘기다. 그 가운데 우리 부모님도 있었다. 이 집은부모님이 두번째로 살았던 집이고 언니를 낳은 후 얼마 되지 않아 또 다른 집으로 이사했단다. 그러고도 내집마련까지 몇 번이나 더 이사를 다녀야했다.


지금처럼 포장이사가 있던 시절도 아닌데. 이사 자체가 얼마나 힘든 일인데. 어린 아이에 이삿짐에 얼마나 고되었을까. 아니, 수중에 가진 건 별로 없지만 살림살이 하나하나 늘려가며 도란도란 예쁜 아기와 함께 행복했을까?


여담으로 1977년 안양천 대홍수는 이재민 6만 명에 사망, 실종자 288명이라는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후 안양천 최악의 홍수로 기록됐다. 당시 안양시내 전역이 물에 잠긴 것은 물론 안양천의 모든 다리가 끊기고, 안양철교 교각이 주저앉아 경부선 철도가 수일간 운행하지 못했다. 이 홍수를 계기로 대대적인 하천 정비 공사가 이뤄져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고 한다.


집이 물에 잠겼을 때, 아빠는 어떤 물건을 제일 먼저 구했을까?


아빠의 대답은 바로 다리 네 개 달리고 문까지 달린 TV! 당시에 TV는 귀한 가전이자 재산이었다. 아빠는 TV에 밧줄을 묶어 끌어올렸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아내와 아기는 병원에 있었으니 그렇다치고 집이 물에 잠겨버렸으니 잠은 또 어디서 잤을까?


"위층 주인집에서 재워주셔서 같이 잤지!"


아이고, 주인 어르신. 저희 아빠 재워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한 가족처럼 지냈던 그 시절이다.


말끔하게 공원이 조성돼 있는 안양천변. 주차장도 있고 운동 공간도 잘 마련돼있다. 건너편 럭키아파트 자리에 예전엔 공설운동장이 있었다고 한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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