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남편을 이해하는 게 부부 관계임을
대개 미국에서 박사 과정에 있는 사람들은 학교에서 주는 스타이펜드에 의존해 살아가게 된다. 프로그램마다, 지역마다, 본인 능력마다 받을 수 있는 자금은 천차만별이지만, 대체로 이곳에서도 문과보다는 이과에서 조금 더 후한 금액을 받는 것 같다.
아쉽게도 남편은 문과 박사이다. 그리고 학교의 정책에 따라서 고학년 (이 프로그램에서는 5학년)부터는 펀딩이 사라져 티칭 수입에 의존해서 살아가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저축해 둔 돈 외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근근이 수입을 이어 왔었다. 나도 공부를 하기 때문에 풀타임 잡을 잡기가 어려운 상황이라 시간을 내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냈다.
어느 날 우리는 다른 박사 과정에 있는 학생들과 간단하게 점심을 먹는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배우자나 가족이 모임에 동행하는 것을 당연스레 받아들여서 내가 그 자리에 가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실 나는 박사 과정 학생들과의 모임이 있어도 막상 참석하면 대부분 학업에 관련된 주제로 학생들이 얘기를 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내가 별로 할 얘기가 없었고, 또 모임에서 내가 모르는 사람들도 있기에 그동안 많은 모임에 불참했었는데, 이번에 오랜만에 같이 남편을 따라나서게 된 것이었다.
여러 주제로 많은 이야기가 오가다가 이번에 새로 들어온 학생이 금전적으로 여유롭지 못하다고 하며 다른 선배 학생들에게 스타이펀드를 제외한 학교에서 얻을 수 있는 자금 루트에 대해서 물었다. 나는 그런 제도가 있다면 남편이 으레 잘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뭔가 얻을 정보가 있나 싶어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학교에서 운영하는 한 장학금 제도에 대한 이야기가 화두에 올랐고, 나는 갑자기 표정 관리를 하기 어려워졌다. 얼마 전 남편이 도전해 본다고 내게 언질을 줬던 한 장학금에 대한 이야기였다.
다른 학생들에 의하면 그 장학금은 박사 과정 동안 총 2번 받을 수 있는 것인데, 금액이 꽤 괜찮았다. 또 학생들의 말에 의하면 그 장학금은 받기가 어렵지 않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 새로 들어온 1학년 학생을 제외하고 우리 남편을 제외한 그 자리에 있는 모든 학생이 최소 1번은 다 받아 갔다는 것이다. 물론 당연히 2번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망치로 머리를 쾅 맞은 느낌이었다. 황급히 테이블 밑으로 손을 숨겼지만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런 좋은 제도가 있는데 그동안 이용을 안 했다고? 수중에 돈이 $30 밖에 없어서 벌벌 떨던 때도 있을 정도로 가난했는데도 그런 제도를 신청하지 않았었다고? 그 장학금 신청하는 게 하루에 수십 가구 모르는 집 배달을 돌면서 고생하는 것보다 어려웠나? 그런 제도를 이제 와서 6학년이나 된 다음에 신청을 고려해 본다고?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우리가 수중에 돈이 많은 것도 아닌데 그런 제도도 안 알아보고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 분했다. 원래도 돈 욕심이 없는 사람인건 알았지만, 만약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절대로 흘러 보내지 않았을 텐데.. 하는 마음이 불쑥 들어서 너무나도 속상했다. 두 번이나 받을 수 있는 장학금을.. 남들이 다 받는 장학금을.. 신청도 하지 않았다니.
그래도 애써 태연한 척했다. "무슨 이유가 있었을 거야. 이제서라도 한다고 하니까 희망을 걸어보자." "내가 박사 과정에 있는 것도 아닌데 그 사람이 안 했다고 해서 내가 화 낼 권리는 없어." "그냥 박사 과정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정신적으로 지쳐있잖아. 그런 사람이 어떻게 다른 일을 할 수 있었겠어." 이해가 잘 가지 않았지만, 섣불리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래도 이유는 알고 싶었다. 내가 스스로 납득할만한 말을 남편이 해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이런 주제에 굉장히 민감하고 화를 버럭 내기 때문에 좋은 타이밍이 필요했다. (남편은 박사 과정으로 인해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 며칠이 지나고 남편의 기분이 좋아 보일 때 이야기를 살짝 꺼냈다.
내가 듣게 된 이야기는 그랬다. 그 장학금은 지도교수가 허가를 해줘야 하는데 본인이 다른 것에도 큰 성과가 없기에 장학금 이야기를 지도교수에게 꺼내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고. 이번에 엄청나게 큰 용기를 내서 그 장학금에 대해 도와달라 이야기를 꺼냈지만, 지도교수가 좋지 않은 답변을 보내왔다고 한다. 더 나아가서 그 장학금에 선발이 되면 학기 말에 그와 관련된 연구 성과에 대해 발표를 해야 하는데 그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고.
그래, 나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을 비웠다. 다른 사람이 다 받았다고 해서 그 일이 모두에게 쉬우리란 법은 없다. 남편에게는 그 말 자체를 꺼내는데 남들보다 몇 배의 용기를 내서 꺼내야 했었던 것이라고. 그래도 이번에 큰 용기를 낸 만큼 선발이 된다면 학교를 다니는 도중에 1번은 받은 게 아니겠냐며.
예전엔 이런 남편의 모습이 답답해서 나도 모르게 질책을 한 적도 있다. 그러면 남편은 나에게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그럼 니가 박사 해보던가!" 그 말이 맞다. 기성용이 그랬듯, "답답하면 니들이 뛰던가!" 그 말이 백번 맞다. 누구든 뒤에서 훈수 두는 것은 참 쉽다. 그런데 막상 본인의 일이 되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 일이라면 그리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생각해 봐도 아니다. 그 자리에서 열심히 하고 있는 그 사람의 상황을, 마음을, 능력을 고려한다면 어느 말이라도 쉽게 할 수 없다.
만약 내가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남편이 나에게 질책했을까? 남편의 성격상 절대로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그렇다면 나도 남편의 편을 들어줘야지. 남편도 본인이 할 수 있었으면 반드시 했을 것이다. 다만 그렇지 못했으니까 하지 못한 것뿐이다. 우리 사이에 그 정도의 신뢰는 두텁게 있으니까 말이다. 그깟 장학금, 안 받아도 졸업하고 취직하면 그게 더 큰 성공이다. 며칠이 걸려 나는 마음의 응어리를 풀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