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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dom akin to feral Oct 23. 2023

클리프행어들의 나날들

절벽에 매달린 두 사람의 요즘 일상

글자 그대로 우리는 절벽에 매달린 사람들 같다.

주어는 바로 나와 남편.


가끔씩 이런 고비가 스쳐 지나간 지 몇 해가 지났다.

계절이 바뀌듯 또 한 번 정신의 고비가 온 것이다.


이쯤 되면 익숙해질 법 한데, 

이 고비라는 것은 인생에 찾아올 때마다 

강도가 조금씩 조금씩 거세져서 더욱 힘들다.


우리가 절벽에 매달리게 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남편의 학회가 코앞으로 다가오면서부터이다.


당장 며칠 안 남은 학회의 준비 자료가

어느 지점에서 막혀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중이다.


데이터에 문제가 생겨서

시간과 정신의 방에 갇혀버린 남편은

하루에도 수십 번 희망과 절망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나는 연구에 직접적 도움이 될 수 없으니

내 할 일을 하면서

요령껏 남은 집안일을 모두 떠맡는다.


원래도 공수 교환이 잘 되는 우리 부부는

한 명이 일 때문에 정신의 방에 갇히면

묵묵히 그 옆을 지키며 서포터를 자처한다.


남편은 그렇다 치고,

그렇다면 나는 어떤 절벽에 매달린 건가?


한참 들여다보던 구멍 난 가계부는

어떻게든 긁어모은 소량의 돈으로 대충 메꿨다.

여기서 조금 정신건강에 스크래치가 났나?


파면 팔수록 더욱더 어려워져서

내가 감당 가능한 일이 맞는지 수백 번 의심이 드는,

하루하루 점점 더 스스로 궁지로 내몰고 있는

이 시험공부가 나를 절벽으로 내몰았나?


누굴 만나 하소연하려다가도

이역만리 떨어진 이 나라에 맘 터놓을 친구도 없다.


아니, 곰곰이 생각해 보면 친구는 한 줌 있는데

주머니가 여의치 않으니

밥 먹기도 부담스럽고 놀기는 더 부담스러워

연락하기도 부담돼서 말았다.


갑자기 오늘 잊고 지내던 어떤 단어를 만났다.

"헝그리 정신"

외로움과 빈곤에 맞서 싸운다.

이거 딱 지금 상황에 쓸 수 있는 말 아니야?


박사과정과 그 가족들의 삶에 대해 검색하다가

이런 찰떡같은 단어를 만났다.


먼저 이 길을 걸어가신 수많은 박사들과 그의 가족들이

지금 나에게는 큰 버팀목이자 위안이다.


돌이켜보면 어떤 일이건 간에

영광은 찰나이고 나머진 다 이렇게 그 영광을 준비하는

길고 지루한 과정의 연속일 뿐이다.

박사과정은 거기에 가난이 추가되었을 뿐.


이 과정에서 나는 요즘 

혼자 하는 싸움에서의 외로움의 절벽을 만난 듯하다.


그래도 "번쩍" 하며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기다리고 버티고 거절당하는 날을 다 지나서

언젠가 꼭 다시 그 영광의 찰나를 맛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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