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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dom akin to feral Nov 17. 2023

서초구 토박이라 해도 되려나

이 정도 살았으면 얘기할 자격은 있겠지

"토박이"라는 단어에 대해 찾아보니

3대째 그 지역에 태어나고 자라는 사람들이라 한다.


나무위키를 찾아보니

사전적 의미로 정말 3대째 한 지역에 머무는 

서울 토박이는 매우 드물고,

서초구 토박이는 더욱 드물다.


역사를 돌아보면

강남권 개발이 1970년대 시작됐고

그전에는 말 그대로 "서초", 즉 "벼"라는 뜻이었으니

여느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농사짓는 땅이었을 것이다.


"강남 1970"이라는 영화에서 보여준 잔혹한 현실을 반영하면

개발 이전부터 서초구에서 태어나 자라

그 지역을 떠나지 않고 대를 이어 살아온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진짜 대단한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사전적 의미의 진짜 토박이는 되지 못하겠지만,

결혼해서 미국으로 이민오기 전까지

꽤나 오랜 시간을 서초구에 살았기에,

나의 유년시절과 대학 이후 삼십 대에 접어든 이후까지

내가 세월을 보냈던 그 공간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니고

서울에서 직장을 잡은 우리 부모님은

사회초년생 시절 서로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90년도에 서초구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 직장이 양재동이었기 때문에 결정한 일이었다.

당시 부모님 말로는 강남구와 서초구 중에 집을 보러 다녔고,

그중에 좋은 아파트가 나와 계약하게 되었다 한다.


그즈음에는 아직 삼풍백화점도 무너지지 않았었고,

동네에는 지금은 한국에서 철수한 하디스 햄버거 가게도 있었다.

센트럴 시티는 생기기도 이전이었다.

까마득한 내 기억 속 90년대 동네 풍경은 이제 가끔 가물가물하다.


우리 가족은 그전에 강북에 살았다.

나는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입학해 얼마간 다니다가

부모님을 따라 이사를 오게 된 상황이었다.


그전 학교에서 나는 예민했지만, 꽤나 똑똑하고 리더십이 있었다.

미국식 표현으로 하면 teacher's pet 그 자체였다.

반장 같은 자리가 있으면 언제나 꼭 하고 싶어 했다.

어린 내가 보기에 당시의 친구들은 바보스러우리만치 착했다.

친구들을 좋아하고 자기주장도 강한 내가 살기 좋은 환경이었다.


선생님들은 모두 나를 좋아했고,

학교 친구들과도 너무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전학을 가던 날 반 친구들이 각자 편지를 써서 나에게 주었다.

나만을 위한 송별회라는 걸 처음 해봤다.


부모님은 집을 사두고 얼마간 전세를 내줬기 때문에

우리는 강북에 살면서도 한 해에 몇 번은 이곳에 왔었다.


아파트에는 큰 놀이터도 있었고

학교는 걸어가기 좋은 위치였다.

옆동에 엄마의 외삼촌 가족이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집에도 종종 방문했다.


어른들이 얘기할 때 가만히 잘 기다렸다가

집을 나와 삼풍 백화점에 놀러 갔던 기억이 난다.

다 같이 음식을 먹었던 기억이 있지만

뭘 먹었는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때의 나는 앞으로 이 동네가 나를 어떻게 변화시킬 줄도 모르고

그저 반짝반짝 거리는 이 동네를 꽤나 마음에 들어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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