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꼬리가 뱀의 머리보다 낫다는 건 허상이었다.
90년대의 어느 날이었다.
전학 첫날 학교 갈 준비를 하면서
당시 잘 나가던 아동복 메이커로
엄마는 나에게 새 옷을 사 주었다.
엄마는 혹여 내가 기죽을까 걱정했나 보다.
엄마는 그날 내가 학교에 다녀와서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고 하셨다.
"엄마, 여기 학교는 애들이 다 공주 같아."
초등학교 저학년의 눈에도 강북에서의 친구들과
처음 만나는 이동네의 친구들의 결이 다르다는걸
한눈에 알아봤나보다.
그 당시에는 나와 같은 반에 있는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인지 그저 듣고 '그렇구나' 하는 게 다였지만,
어른이 되어 생각해 보니 그 안에서 내가
아주 작고 보잘것없이 평범한 사람이 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제주도에 몇 번 가봤던 것이
비행기를 타고 내가 갈 수 있었던 최대한의 거리였다.
첫 여권을 중학생 때 만들었으니
당연히 해외에는 나가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 반에는 이미 많은 아이들이
해외 경험이 있었다.
애초에 미국 시민권자인 아이들도 있었고,
부모의 주재원이나 학업 등으로
서구 문화권이나 일본 등 당시 선진국에서
몇 년이나 거주하고 돌아온 아이들도 많았다.
해외에 친척이 살고 있어서
방학 때마다 혹은 명절 때마다 해외 방문을 하고 온 아이들은
그 당시에는 매우 희귀했던 일제 혹은 미제 제품들을
당연하다는 듯이 가지고 다녔다.
급식에 뿌려먹었던 일제 후리카케는
어찌어찌 친구에게 받아 조금 맛볼 수 있었다.
지금 한국의 교육에 대해서
아는 건 많이 없지만,
당시의 교육에서 장래희망 적기는
매 년 돌아오는 중요한 의식 같은 거였다.
우리 반에서 상당수는 판사 혹은 검사를 희망했다.
나는 그 당시에 그게 뭐 하는 직업인지도 몰랐는데,
아이들은 당연히 자신의 길은 법조인이라는 말을 당당하게 해댔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동네에는 대법원을 비롯하여
서울 중앙 지방 법원 등 많은 법원이 위치해 있었다.
당연하게도 학부모 중에 사법고시 출신
판검사들 및 변호사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그 당시 법조계 부모님들은
아이들이 자신의 길을 따르기를
아주 어릴 적부터 주입시켰고,
아이들은 그래서 본인의 꿈은 당연히 판검사라고 말했던 것이다.
부모님 뿐만 아니라
이미 할아버지 대부터 대한민국 정치에
큰 획을 그으신 분들도 꽤나 있었다.
물론 당시에는 하나도 몰랐고 나중에 어른이 되어 알았다.
그런 가정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당당하게 법조인이 되겠다 얘기하는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비단 이건 법조계 장래희망 자녀뿐만이 아니었다.
당연히 부모가 교수이거나 의사이거나 하는
전문직 부모들의 자녀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그 꿈을 이뤄가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서 나같이 비 전문직 부모를 둔,
그렇게 부자가 아닌, 같은 반 아이들은
그런 아이들의 꿈을 실현해 주기 위한
불쏘시개 같은 역할이었다는 걸 그때는 어려서 잘 몰랐다.
초등학교 당시에는
아직 머리가 덜 크고, 사춘기도 오질 않아
모든 아이들이 곧잘 어울렸다.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 덕분에
나는 엄마가 집에 돌아오기 전까지
학원에 가거나 친구집에 가서 놀았다.
내가 그 당시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의 집에
가끔 초대받아 놀러 가면
나는 친구 집이 너무나도 좋아서
몇 시간이고 계속 놀고 싶어지곤 했다.
몬테소리 교구가 가득 차있는 아이보리색 붙박이장은
그 당시에 너무나도 멋진 충격이어서
아직도 그 장면이 생생하다.
우리 집에 있는 시시한 작은 레고가 아닌,
가로 세로 높이 1미터가 되는 아크릴 판 안에
멋지게 세트로 맞춰 전시되어 있는 레고들은
흡사 이곳이 친구 방이 아니라 레고 매장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백화점에서도 그렇게 전시되어 있는 곳은 없었다.
미제였나, 독일제였나 모르는
얼음이 생성돼서 버튼 하나만 누르면
얼음이 쏟아지는 냉장고가 처음에는 신기했지만,
그 집에 자주 놀러 가면서 이내 나도 당연스레
냉장고에서 얼음과 정수물을 받아 마셨다.
친구가 "이모"라고 부르셨던 분이
진짜 이모가 아니라 입주 가정부/유모라는 사실은
내가 고등학생이 되어 알게 되었다.
우리 집 차는 현대 소나타였지만,
친구들 부모님들은 연예인들만 타는 줄 알았던
스타크래프트 밴을 소유했었고,
데일리 카로 아우디 혹은 벤츠를 타고 다녔다.
지금껏 쭈욱 나열했던 것들이
90년대가 아닌 2020년대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즉, 내가 속해있던 90년대의 그 사회는
평균 대한민국보다 30년 앞서있던 사회라는 말이다.
나라가 휘청거렸던 IMF시대에서도
큰 무리 없이 본인들의 사회적 명성과 부를 지킨 끄덕없던 사람들이었다.
우리 부모님도 그 당시에는 나의 인생이
이렇게 의도치 않게 어렸을 때부터
큰 비교를 당하며 좌절하고 살 것을 예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속한 환경은 내가 그들로부터
나를 안전하게 지키기에는 너무 힘든 환경이었다.
분위기를 잘 읽고 사람들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성격은
내가 나를 망치기에 너무 최적화된 조건이었다.
우리 집의 가정환경이,
섬세하고 순진했던 나의 성격이,
성장기에 원치 않은 경쟁에서 비교당하던 환경이 합쳐져
나는 꽤 오랫동안 이 동네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