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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dom akin to feral Feb 12. 2024

30대 수험생, 시험은 늘 어렵다

Photo by Siora Photography on Unsplash


재작년 11월에 시험을 본 뒤로, 아주 오래간만의 시험이었다.


시험이 며칠 안 남았을 때, 사실 나는 번아웃이 왔다는 걸 몸소 체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열치열의 마음가짐으로 번아웃이 온 상황을 오히려 공부로 막아낸다는, 

다소 가학적인 방법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요 몇 달간의 생활에 대해 잠시 돌아보자면,

나의 모의고사 성적이 조금 오를 기미가 보이면 그 틈을 못 참고 

내가 가진 작은 희망을 냉소로 답하게 하던 점수대가 다음 시험에서 어김없이 나왔고,

나중에는 그 마저도 익숙해져서 "그럴 줄 알고 있었다고" 하며

낮은 숫자의 점수를 만나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렀었다.


점수 상승폭이 너무나도 지지부진해서 내가 공부하는 방법 자체가 잘못되었구나 생각했었고,

더 나아가서 나라는 사람은 기초가 없으니 그 위에 쌓은 모래성이 자꾸 무너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10대의 수능을 준비하던 내가 30대가 되어 다른 시험을 준비하며 달라졌다고 느낀 게 있다면 

이젠 타인의 말에 일희일비하며 휘둘리는 대신, 어느 정도 필터를 갖고 거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Reddit에서 점수가 큰 폭으로 상승하던 사람들은 고득점 비법으로 과외에 대해 많이 언급을 했었고,

애초에 과외를 받을 정도의 금전적인 여유도 없거니와 고득점에 대한 욕심도, 목표도 없는 나는

열폭을 느낄 새도 없이 그런 류의 게시물들을 다른 세상 사람들 이야기로 넘겨버렸다.


시험 관련 카카오톡 오픈카톡방에서도 이상 행동으로 어그로를 끄는 사람들을 보면

같이 화내거나 기분 나빠하기 전에 적신호를 감지하고 과감하게 방을 나갔다.


시험을 겪으면서 또 내가 달라졌다고 느낀 것은 "이것 아니면 죽음뿐"이라는 극단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오히려 시험공부를 하는 행위나 시험을 보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만 몰두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이런 변화는 간혹 가다 문득 공부하는 행위, 지식을 쌓아가는 행위 그 자체에서 오는 순수한 기쁨을 느낄 수 있게도 해 주었다. 


전반적으로 이번 수험생활동안 나는 선천적으로 기질이 예민한 사람임을 인지하고, 다만 그것이 스스로를 망치지 않도록 나를 조절하고 마음을 편하게 먹도록 노력했다.

이름하야 "덤덤충 작전"으로 나는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마음을 편하게 먹도록 노력했다.


결과가 어찌 되었든 간에 그건 나중 일이니 나중의 나에게 미루고

준비하는 과정 자체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만큼 해보자고 긍정적인 생각들을 불어넣었다.



Photo by Nguyen Dang Hoang Nhu on Unsplash


그렇게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시험 당일이 찾아왔다.

나름대로 열심히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생각했지만, 역시나 시뮬레이션과 실전은 다르긴 했다.


겨울이 되면 찾아오던 역류성 식도염이 이번 겨울엔 덜했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비책이 없었는데, 시험 당일 갑자기 미칠듯한 기침과 토악질이 찾아왔다.


시험이 한 시간도 남지 않았는데 시작된 기침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침에 마셨던 커피는 자꾸 역류하고, 목이 찢어진 건지 피맛이 진하게 나는 기침은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급하게 역류성식도염 약을 찾았다. 위산 억제제를 먹고 시험을 치러보지 않아서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내가 아는 기침이 잦아들게 하는 방법은 그것뿐이기에 시험 시작 30분 전에 약을 먹었다.


이제는 더욱 시간을 지체할 수 없게 되었고, 시험 시간 20분 전에 Prometric 프로그램을 켰다.


어찌어찌 시험을 위해 프록터가 시키는 대로 차근차근 모든 절차를 밟았고, 드디어 시험이 시작되려나 하는데

프록터가 나에게 ID랑 비밀번호를 알고 있냐고 했다.


"뭘 준비했었어야 하는 거지....?" �


프록터가 말하는 게 무슨 ID랑 비밀번호인지 몰라서 잠시 패닉이 오기도 했지만, 다행히 수험번호나 접수번호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로헙 웹사이트 ID와 비번이어서 잘 넘어갈 수 있었다.


지난 시험에서 프록터 이슈를 직빵으로 맞았던 나는 설마 이번에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걱정이 있었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아무 문제 없이 시험을 진행시킬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외부의 문제는 없었고, 단지 "나만 잘하면 돼"의 환경이었다.


기존에 연습 때는 "덤덤충 작전으로 가자!"라고 외치며 어려운 문제는 과감히 스킵하곤 했는데,

실전의 나는 그렇지 못했다. ㅎㅎ 


평소 같으면 넘길 문제도 필사적으로 붙잡고 시간을 계속 잡아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와중에 눈치도 없이 토악질 기침은 2교시가 지나갈 때 까지도 계속되었다.


시험 보는 도중 잠시 시끄럽게 음악을 튼 차가 집 앞을 서성거렸고, 그리고 몇 분 간 이어진 소방차의 사이렌소리가 귀마개를 뚫고 들어와 나의 집중을 흐트러놓기도 했지만, 그 외에는 대부분 시험에만 정신을 몰두했다.


시험의 절반이 지나고 쉬는 시간이 되었다. 

나는 화장실만 빠르게 다녀와 총 10분 동안의 쉬는 시간 중 5분만 사용하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다시 방 안을 꼼꼼하게 점검받고, 주머니와 손, 안경, 귀마개 등 모든 것을 검사받았다.


시험 후반부는 생각보다도 더 빠르게 지나가버렸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3교시가 시작되고, 마지막 교시도 끝나버렸다.

야속하게도 시험이 끝나니 기침도 뚝 그쳤다. 나를 방해하는 건 내 몸뚱이뿐인 시험이었다. ㅎㅎ


시험이 끝나고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잘 봤어?" 하는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말을 얼버무렸다. 

잘 본지는 모르겠고 일단은 끝났다는 생각에 얼떨떨한 기분이 이어졌다.

곧 남편은 우리가 시험 끝나면 먹기로 한 김밥과 떡볶이를 사들고 집에 도착했다.




시험을 마치고 하루가 지난날 오후, 갑자기 인터넷이 되질 않았다.

만약에 시험 일정을 하루 뒤로 잡았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니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새삼 생각해 보니 시험을 보는 과정에서 내 주변 사람들이 무탈하게 자기 일을 잘해주었기에 나도 큰 걱정 없이 시험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깝게는 남편과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크게 아프지 않고 자기 일상을 살아감에 감사하고,

시험 시간을 피해 저녁에만 시끄럽게 음악을 트는 이웃도 고맙고,

시험 다음날 인터넷이 고장 난 우연도 감사하게 느껴졌다.


애당초 올해 두 번의 시험을 보자고 마음먹었기에 이 수험 생활은 아마도 당분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앞으로도 크고 작은 굴곡들이 내 앞에 계속 있겠지만 덤덤한 척하며 앞으로 걸어 나갈 생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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