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eedom akin to feral Mar 18. 2024

박사과정과 우울증

Photo by Mitch on Unsplash


별안간 석사 시절이 생각난다.

과제가 몰아치거나 발제가 있거나 그룹 토론 준비를 해야 할 때면

우리 동기들은 그룹룸에 모이곤 했다.

한창 몇 시간 토론을 하고 나면 잠시 쉬는 시간을 갖곤 했는데

그때 우르르 몰려 나가는 무리가 있었다.


여자들도 몇몇은 그랬지만 특히 남자들은 연초를 태우거나 전자담배를 끼고 살았다.

난 여러 이유로 인해서 여태껏 담배를 입에도 안 대봤지만

피우는 사람들 말에 의하면 스트레스 완화에 도움이 된단다.


그로부터 시간은 흐르고 몇 년간 박사과정에 있는 남편은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다.

남편은 담배는 안 하지만 술을 마신다.

원래도 술을 좋아하지만 요즘 먹는 술은 좋아서 마시는 건 아닌 거 같다.

어떤 스트레스 풀 거리가 없으니 그거라도 마시는 것이다.


비단 남편뿐만이 아닌 것 같다.

같은 프로그램에 있는 박사과정 친구들 집에 놀러 가면

항상 술병이 많이 쌓여 있다.


술을 한 방울도 입에 안 대던 친구 집에도

위스키 병, 와인 병이 하나 둘 생겨난다.


집 앞 마트만 가도 여러 가지 세계적인 술들을 파는 미국인데

관심만 가지면 다양한 술을 맛볼 수 있는 환경이다.

그러니 술에 관심이 생긴 마당에 안 마시게 되는 것도 이상하다.

게다가 박사생은 누가 봐도 스트레스받을만하지 않은가.


술뿐이랴.

자극적인 매운 음식을 계속 갈구하는 습관도 생긴다.

스트레스를 풀 곳이 마땅치 않으니 먹을 것에 더욱 관심이 생기는 듯하다.

오죽하면 엄마(장모님)한테 부탁해서 그 맵다는 원조 실비김치를 항공으로 공수받았다.

이렇게라도 해서 마음이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면야.


사실 이런 것은 표면적인 얘기들 뿐이다.

남편은 박사 과정을 하면서 몸만 망가지는 게 아니라 마음도 망가져 간다.


남편은 말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자기 뜻대로 안 된 일이 없었다고.

그런데 박사 과정은 그렇지 않은 첫 번째 일이라며.


남편의 마음을 듣고 사실 바로 공감했었어야 하는데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음 역시 미국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대학까지 나온 사람은 대체로 실패를 경험해 보기 어렵군.


그 생각이 들고 나서야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남편에게 공감했다.

이렇게 한 번도 무너져보지 못한 사람이 처음 시련을 겪는데 그게 하필 박사과정이라니.

커다란 에베레스트 산을 인생 첫 시련으로 맞닥들인 게 된 그에게 집중하니

그게 얼마나 큰 고통일지 짐작이 갔다.


남편은 원래 업다운이 심하지 않다.

바위 같은 성격의 소유자이다. 뭘 해도 무덤덤한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이 바늘처럼 예민해진다.

대체 바위를 바늘로 만드는 박사과정이란 뭘까?


나는 남편에게 여러 차례 상담을 권유했다.

남자들은 대개 상담에 거부감을 느끼고, 남편도 역시 그랬다.

그래도 여러 번 권유하니 어느 날 좋은 기회가 왔다.

남편은 너무나도 힘드니까 밑져야 본전으로 상담에 응했다.

한국 상담 어플을 통한 1시간 반 짜리 전화 상담이었다.


그 상담이 좋은 성과를 가져왔다.

짧은 상담이었지만 남편이 얻은 게 많았다.

내가 해줄 수 없는 영역을 상담사분이 해준 것이다.


그 후로 남편은 학교 상담사를 찾아갔다.

학교 상담을 활용하라는 조언도 그 한국 상담사분께서 해준 것이다.

아무래도 미국 학교 상담사는 그만큼의 효과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 같다.

그래도 남편은 꾸준히 3-4번을 나갔다.

뭔가 도움이 되면 좋겠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오늘도 갑자기 작은 일에 불같이 화를 내는 남편을 만났다.

나라도 평정심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한 번은 참았는데 두 번은 나도 같이 화를 냈다.


싸움에 별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든다.

인간은 왜 같이 살까부터 시작해서 결혼이 대체 뭐기에 등등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지겨운 박사과정은 언제쯤 끝날까 싶고

끝난다고 뭔가 크게 바뀔까 싶고

어떠한 보상이 보장되어 있는 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만두라 하기엔 매몰비용이 너무 크고

또 근데 굉장히 화가 나고

내 마음은 아무도 몰라 주는 현실이 서글프고


싸운 김에 방청소도 하고 이불빨래도 하고 설거지도 했다.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마음을 제대로 다스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주부 역할이나 하면서 부정적인 기운을 공중에 흩날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섯 번째 겨울방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