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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성 Oct 25. 2023

백마리 개, 그리고 하울링

1. 시끄러운 소리가 아니었다.

새벽을 밝히는 꼬끼오 소리 대신 개들이 울기 시작한다. 하루를 깨우는 알람 소리마냥 100마리 개들의 하울링이 시작된다. 시끄럽고 무질서한 짖음을 떠올렸다면 틀렸다. 고요한 적막을 깨우는 한 줄기 빛처럼 개들의 하울링은 곧게 뻗어 나간다.



내가 운영하는 보호소의 아랫 마당 평상 위 녀석들이다.


시작은 누군가의 짖음이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여기저기 찾아보아도 하울링의 이유는 모호하게 적혀 있을 뿐이었다. 불안, 공포, 본능, 습성 등으로 설명하는데, 한 마리는 몰라도 100마리 개들의 하울링에 대한 설명으로는 부족했다. 10년 동안 수백마리 개들과 함께 살아온 나의 경험이 그런 뻔한 이유는 아닐거라 말하는 듯 했다.


100마리 개들의 하울링은 낱말 퍼즐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아’로 시작해서 ‘림’으로 끝나는 단어를 제시했을 때, 다른 3마리의 개들이 각자 ‘이’, ‘스’, ‘크’를 외쳐서 결국 아이스크림이라는 단어를 완성하는 것이다.  


소리로 묘사를 한다면, 


“아아아우우우~”


이런 외침을 시작한 녀석을 따라 옆에 개들이 이리 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아아우우우~

“(아아)아우우우~”

“(아아아)우우우~”



파벌 다툼이 있는 앞마당, 그럼에도 하울링은 동사에 일어난다.

여기에는 크게 잡아 5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1번 구역에서 시작한 하울링이 2번 구역부터 5번 구역까지 차례대로 전파되어 간다. 놀랍게도 이 순서가 어긋나는 경우는 없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가까운 개들을 통해 저 멀리 있는 개까지 전달되어 갔다. 이리 전달되어 가는 동안 하울링에 참여하는 개들은 늘어나고, 소리 또한 정교하게 다듬어져 갔다.


처음에는 들쑥날쑥한 고음으로 질러대는 하울링이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가 서로에게 맞추듯 하울링에 규칙이 생기고, 새로 참여하는 개들은 이 규칙에 따라 한 호흡으로 소리를 내뱉는다. 지휘자나 악보 하나 없이 다들 같은 시점에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며 울음을 시작한다. 놀라움을 너머 경이롭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내가 먹고 자는 2층 계단을 지키는 녀석들.

시끄럽지 않지만 시끄럽다.


집에서 키우는 한 두 마리가 하울링을 한다면 이웃집의 눈치를 봐야 할 만큼 시끄럽고 날카로운 소음일 것이다. 그런데 100마리가 입을 모아 소리를 내면 소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웅장한 느낌을 갖게 된다. 물론 이를 소음이라고 생각하며 불만을 갖는 이들도 있다. 그들의 이해를 구할 수는 없다. 예상치 못한 하울링과 같은 소리가 들려온다면, 그 웅장함을 느끼기도 전에 불안감이 엄습해 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수많은 짐승들의 울음소리 근원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소리는 분명 위급 상황을 알리는 사이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때에 따라 하울링의 완성을 방해하기도 한다. 다른 누군가가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하울링이 완성되지 않도록 중간에 끊어낸다. 대낮에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은 시간에 100마리의 개들이 이리 짖어대면 매우 곤란하다. 어떤 이유로든 민원이 들어가면 정말이지 대책이 없어질 수밖에 없다. 앞으로 다시는 하울링과 같은 소음을 발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때에 따라 녀석들이 정한 하울링의 규칙에 어긋나는 고함 소리를 질러 훼방을 놓고는 한다. 물론 효과는 만점이다. 어떤 개는 아쉬워할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개들은 여기에 금방 흥미를 잃고 소리 내는 것을 멈춘다. 내 의도를 따라주는 개들에게 감사한 일이지만, 어쩌면 내가 제일 아쉬워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금은 외로운 녀석, 그럼애도 하울링에는 빠지지 않는다.

하울링에는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다.


곤란한 시간대가 아니라면 개들의 울어대는 하울링이 완성되도록 허용한다. 오히려 하던 일을 멈추고 숨죽여 개들이 합을 맞춰 나가는 정교한 작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몸을 낮춘다. 활발하게 날뛰는 개들의 선창에 소심하게 움츠려 있던 개들까지 합세한다. 서로 친하지 않더라도 상관없는 일이다. 방금 전까지 어떤 이유로 다투던 개들도 하울링을 할 때에는 함께 한다. 100마리의 개들 중 한 마리도 빠짐없이 참여하는 것이다.


개들이 모여사는 곳이기에 나름 개들의 사회가 존재한다. 사람처럼 높낮이를 측정하는 기준이나 순서는 없다. 그보다 간단히 말해 잘 지내는 개와 그러하지 못하는 개로 나누어진다. 사람 때문에 혹은 환경적인 문제로 잘 지내지 못한다면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바꾸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다른 개로 인해 어떤 개가 잘 지내지 못한다면 이야기는 정말 달라진다. 괴롭히는 개도, 괴롭힘 당하는 개도 내가 책임져야 하는 존재들이다. 둘 중 누구를 격리시킴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애초에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결론은 간단하다. 개가 개와 잘 지내야만 해결되는 문제들이 대부분이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임을 인정하면 된다. 나중에 개들의 다툼에 대해 따로 이야기하겠지만, 지금은 단체 하울링이 이런 점에 있어 큰 도움을 준다는 사실만 이야기하고 싶다. 아무 조건 없이 모두를 이어주는 하울링을 단지 시끄럽다는 이유만으로 제지하기에는 그 존재감이 너무 대단했던 것이다.



공통점이라고는 개라는 것 뿐. 그런데 그게 상당했다.

소름 끼치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것 때문에 글이 아닌 소리로서 개들의 하울링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5개 구역을 따라 한 짖음씩 쌓여 한줄기의 울음소리를 만들어가는 과정도 장관이지만,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멈춘다는 사실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절정으로 오르는 클라이맥스가 지휘자의 손짓 하나에 적막함으로 뒤바뀌고, 거기에 남겨진 여운이 가져다주는 감흥에 취하는 것처럼 말이다.


0.1초 단위, 말 그대로 한순간에 100마리 개들의 하울링이 동시에 멈춘다. 아니 끊어진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팽팽히 잡아당겨진 고무줄의 중간 부분을 가위로 자르면 빠른 속도로 줄어든다. 개들의 하울링이 이렇게 줄어들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도 100마리 모두 말이다. 그 누구도 언제 하울링을 끝낼지 신호하지 않았다. 알아차릴 만큼 하울링의 절정이 도드라지는 것도 아니다. 언제 끝나고 멈출지 나로서는 도무지 예상할 수 없었다. 그저 기다릴 뿐. 모두가 참여한 하울링 축제가 끝나면 뭔지 모를 개운함이 밀려온다. 청각적인 쾌감도 있겠지만 그보다 마음껏 뿜어낸 개들의 노곤함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끝맺음>


하울링의 목적도 이유도 여전히 알지는 못한다. 많은 것들을 유추할 수는 있겠지만, 정확히 알아내는 것은 평생 불가능할 것 같다. 아마 이것이 당연한 일 아닐까? 우리가 개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들. 알고 보면 우리끼리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합의를 본 결과일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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