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버지가 밉냐고 물었다.
오늘이 기적 같을 때가 있다. 어제저녁 마당에 앉아 혼자 웃었다. 살아온 나날들, 그 속에서 수집하듯 담아놓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나의 어린 시절은 슬프지 않았다. 허나 분명 힘겨웠다. 성장하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별로 특이한 이야기는 아니다. 누구나 힘들었던 지난 일로 오늘의 기억을 채운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 속옷부터 챙겼다. 교복을 벗기도 전에 숙제부터 끝내야 했다. 다음 날 챙겨야 하는 교과서와 준비물을 가방에 쑤셔 넣고 현관 밖에 내놓았다. 한 시간, 두 시간이 흘렀다. 가슴이 조여 왔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았지만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셨다.
아버지가 밉지 않느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아니라고 답했다. 술 먹지 않은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그저 웃어 보였다. 훗날 들은 이야기로는 그때 비로소 안도를 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왔다. 하나부터 열까지 어머니를 트집 잡았고 그때마다 난리가 났다. 미리 챙겨 놓은 어머니 속옷과 현관 밖 가방을 챙겨 건너편 골목으로 향했다.
다시 한 시간, 또 두 시간이 흘렀다. 골목 끝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는 그렇게 골목에서 나를 찾았다. 아버지가 잠든 집보다 골목이 편했다. 춥지 않은 날이면 골목에서 잠을 청했다. 추운 날에는 딸 셋인 집에 신세를 져야만 했다. 사춘기 소년이 1~2살 차이 밖에 나지 않는 소녀 셋 사이에서 잠들 수 있었을까? 눈을 감고 하나 둘 셋 하면 아침이 되기만을 기도했다.
당시 버스 정거장을 11개 지나야 어머니가 일하던 가게가 있었다. 주변이 모두 깜깜해지고 인적이 드문 새벽이면 어머니와 나는 밤길을 걸었다. 40분 정도 걸어 가게에 도착했다. 주인이 단속한 문은 모두 잠겨 있었다. 뒤로 돌아가 작은 창문을 열었다. 어머니가 일부러 잠그지 않고 퇴근한 그 창문이었다.
중학생 아이가 들어가기에 비좁았지만 항상 잘 해냈다. 어머니는 밥 한 공기와 반찬을 조금씩 챙겼다. 나는 돈통을 열어 500원짜리 동전을 주머니에 담았다. 어머니가 챙긴 것은 아버지의 아침 식사가 되고, 내가 챙긴 것은 어머니의 출근길 버스비가 되었다. 그렇게 살았다.
학교를 가지 않는 날이면 골목을 돌았다. 자세를 낮춰 차 밑을 훑고, 자판기 잔돈받이에 손가락을 넣었다. 유난히 추운 겨울 어느 날, 단돈 100원이 모자라서 어머니는 11개 정거장을 걸어가셨다. 얼마나 멀고 힘든 길인지 나는 알았다. 주말이면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나 또한 그 길을 걸어갔기 때문이다. 가수 쿤타의 노랫말이다. 이해하기 힘든 삶이었지만 우린 그렇게 살았다.
당시 케토톱 파스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5장이 들어 있는 케토톱 파스가 3,00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중학생이 되어서야 어머니의 생신을 처음 챙겼고 케토톱을 선물했다. 감사의 편지도 포장도 없었다. 어머니의 심부름을 다녀온 것처럼 그렇게 내밀었다. 어머니는 고맙다고 했다.
운이 좋았다. 공부가 잘 되었고 시험 문제가 쉽게 보였다. 반에서 7등을 했다. 전교에서 10% 안에 들었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는 어머니에게 성적표를 내밀었다. 말 없는 아들이 건넨 성적표를 보고 어머니는 우셨다. 1년이 지나 중학교 3학년이 되었고 나는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를 선택했다. 아버지는 반대했지만 어머니는 찬성했다. 집 떠날 기회를 내가 놓치지 않기를 바라셨다.
9년째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강원도와 경상도 경계선에 자리 잡은 절에 모셨다. 가끔 찾아뵙는다. 고속도로를 타고 국도를 지나 지방도를 거쳐간다. 계곡을 따라 아슬아슬한 산길을 오르면 절이 보인다. 입구에 주차하고 다시 30분을 걸어야 아버지를 모신 곳에 도착한다. 원망은 오래전에 끝냈다. 평생 나눈 대화가 한 줄이 되지 못하지만, 매번 아버지를 떠올려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내 기억 속 온화한 선비 같은 아버지가 답했다.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