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날의 감정은 언제나 늦게 도착한다

King Gnu - 白日 (hakujitsu)

by ustu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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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백일이라고 하면 일 수로서의 의미를 떠올린다. 연인과 교제를 시작한지 100일이 되었다, 혹은 아이가 태어난지 100일이 되었다, 같은. 그래서 백일(白日)은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한 단어다.
곡의 제목인 백일은 ‘흰 백(白)’ 자에 ‘날 일(日)’ 자를 써 ‘구름이 끼지 않아 밝게 빛나는 해’라는 뜻을 갖고있다. 이 단어의 뜻만 놓고 보면 파란 하늘에 해가 떠있는 맑은 날이 연상되지만, 이 노래는 맑다기보다는 눈부신 느낌에 더 가깝다. 가사도 멜로디도 보컬도 예외는 없다. 보컬인 이구치 사토루의 가성으로 시작되는 도입부를 듣고 있자면, 햇빛에 눈이 부신 게 아니라 구름이 옅게 껴있어 흐린 날, 구름에 산란된 빛들이 눈을 마구 내려쳐 눈을 뜨지 못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구름은 빛을 산란시켰을 뿐, 구름이 직접적으로 눈부신 빛을 낸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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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 당연히 나쁜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 사람을 잃게 된다. 연인 뿐만이 아닌 모든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상처를 줄 의도가 있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수도 있겠다. 문득 이런 의문도 든다. ‘나에게 정말로 나쁜 의도가 없었을까?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라면 풀 수 있지 않았을까?’
당연하게도 후회는 대부분의 액션 영화 속의 경찰들처럼 사건들이 일단락된 후에 온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 세계관이 아닌 이상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잘못을 뉘우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게 가능했다면 후회(後悔)가 아니라 전회(前悔)라고 칭해야 했겠지. ‘후회’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가 바뀌었거나.
아무튼 상처를 받은 쪽은 이미 떠났다. 빡세게 오답노트를 작성하고, 잘못을 뉘우친다면 앞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는 있겠지. 그러나 이미 떠나버린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설령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예전과 똑같을 수는 없다. 정말이지, 가능하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심정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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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느만큼이 필요할까, 10초? 아니면 1년? 아니면 완전히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어릴적 키우던 게임 속 캐릭터처럼 ‘리셋’ 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면 얼마나 쉬울까? 물론 게임에서만 적용되는 얘기라고 생각한다. 현실에는 그런 편리한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리셋을 원한다면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이 조금 슬퍼할까? 미안해, 흘려들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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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려들어줘, 같은 건 없다. 내가 무심코 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 없음을 알고, 애써 못 들은 척 해달라고 부탁하는 말일 뿐. 물론 홧김에 한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들. 하지만 모든 진실이 아름다운 법은 아니니까.
전부 사실이다. 후회하는 것도, 가능하다면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도, 이런 말들을 내뱉고 싶지 않은 마음까지도. 이런 나약한 생각따위는 당연히 타인 앞에서는 숨기고 싶으면서도, 또 다 토해내고 싶다는 충동이 들 때가 있다. 그러고 나면 또다시 찾아오는 지긋지긋한 후회와 자기반성의 굴레.
그래도 어쩌겠는가. 돌이킬 수도 없고, 다시 시작할 수도 없고, 하물며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어있는 것은 더더욱이 불가능한데. 물론 그런 건 원하지도 않는다. 결국에는 아무리 눈이 세차게 내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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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스스로 나아가지 않더라도 시간은 흐른다. 모두가 나아간다. 아직도 혼자 남아 풀지 못했던 문제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익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시계의 숫자들과, 달력의 날짜들은 그 무엇도 해결해주지 않는다고 되뇌인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 몇 개쯤이야 누구에게나 있다고 또 되뇌인다. 머리로 아는 것과, 그렇게 행하는 것은 항상 별개였다. 이 곡의 화자는 이 지긋지긋한 굴레의 틈에 멈춰 서서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어나가야 한다고.
이야기의 결론은 항상 진부한 얘기다. 어쨌든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그러지 않는다면 살아갈 수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보면 아주 잠깐이라도 눈부신 날이 오기도 하겠지. 단지 우리가 그 순간을 너무 늦게 알아차릴 뿐이다.





어쩌다 보니 후회에 관한 글이 벌써 2개가 됐다. 당연히 같은 주제로 또 쓰고싶었던 마음은 없었다. 이 노래에 관해서 쓰고싶은 마음이 항상 있었는데, 쓰기 시작하고 보니 우연히 주제가 겹쳤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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