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하루

by 유주얼


하루만 더 살아보라고

등 떠밀어

길을 나섰다


태양은 바보처럼

틔우지도 못할

아스팔트에 내리쬐어

백억 년의 수명을

초단위로 단축시키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좌표를 이동하며

영원한 만남을 찾겠노라

점점이 흩어진다


머리 위 나무 우듬지에

긴 서풍이 부는 계절

저마다의 숨결은 영수증처럼 끊어져

가방 속 어딘가에 처박히는데

나 역시 가방 하나는 잊지 않은 채

노선을 이탈할 줄 모르는

전철을 탄다


날마다 비슷한 욕망을 삼켰는지

너와 나는 서로의 얼굴이 보이는 키를 가졌다

그 재미에

전에는 사람을 구경하기도 했지만

언제부턴가

차창을 볼 때마다 변하는 건

내 모습뿐이다


외치는 이들은 많으나

듣는 이는 없어서

눈길 닿는 곳마다

소리 없는 발광이 환청으로 떠도는데

멈추었다 가고

멈추었다 가는 단순한 리듬 속에서

마음은 수시로 닫혔다 열리고

마침내 빈자리를 찾아 눈감은 피곤이

재빠르게 꿈속으로 숨어든다


하루가 아닌 날은 없었다

어쩌다 내 것이 네 것보다 좋아 보여

겨자씨만한 자만을 위선으로 부풀리던 날

어쩌다 네 것이 내 것보다 우월해 보여

광야 같은 절망을 골방에 가두던 날

어떤 날은 네 것과 내 것을 섞고서

우연한 촉발과 팽창에 감격했지만

또 어떤 날은 마구 뒤엉킨 네 것과 내 것을

풀어낼 길 없어 처참히 잘라내야 했던

그런 날들 모두

하루였다


한때는 대범하게

하루를 건너뛰기 위해 하루를 쓰기도 하고

다시 하루를 써서 하루를 벌기도 하면서

새로운 궤적을 그려 볼 믿음으로

떠났던 것이지만 거기에서도

내 키는 인간의 키를 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낯선 이와 입을 맞추고

벼랑 끝 길을 함께 걸으며

어이없이 위험해지곤 했지만


모든 격정은 훗날

예외 없이 환연해지고

기억만이 끈질기게 날카로웠다


돌을 삼킨 듯

오래도록 소화되지 않는

크고 작은 방황의 증거들은

시시때때로 부딪혀 원시의 불을 일으키고

가까스로 걸러낸 순한 풍경을

태초의 혼돈처럼 태워버렸다


길은 내 안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도

나약한 방탕을 고집했으니

다녔던 길마다 불순한 발자국이 찍혔을진대

이제 나는 범죄의 완성을 바라는 범인처럼

그 길을 다시금 꿈꾸고 있는가

한 번도 아물지 못한 사랑을 붙들고

여전히 떠나고 싶다는 것인가


꿈에서 깨어나니

밀려난 삶을 쫓아

멀어진 도착지


번호대로 출구가 정해진 바깥세상은

때로는 비가 내리고

때로는 바람이 불었겠지만

대부분 평범한 운수대로

그 하늘 그대로다

다만 어두워졌을 뿐

여전히 별이 없는 하늘


죽기 전에 아마도 못 가볼

멀고 먼 어느 사막의 밤은

하늘에 별이 많은 것이 아니라

별들이 곧 하늘임을

들킨다 하던데


그래서 나는


나는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가장 오래된 공포가 친숙하게 묻는다


누가

나를

하루만 더 살아보라고

등 떠밀었나


그런 적이 정말로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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