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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얼 Dec 17. 2022

그날 그 식탁

사랑의 규칙 40가지 - 번역 (1)

엘라      


노쓰햄튼, 2008년 5월 17일


그녀의 부엌 창문 밖에서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온화한 봄날이었다.

훗날 엘라는 이 장면을 그녀의 마음속에서 수없이 재생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것은 과거의 파편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이 세상 어디에선가 현재 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생생한 느낌이었다.  

그때 엘라의 가족들은 토요일 오후 식탁에 둘러앉아 늦은 점심을 함께 하고 있었다. 남편 데이빗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튀긴 닭다리를 접시에 담고 있었고, 에비는 나이프와 포크를 드럼 스틱처럼 흔들고 있었다. 에비와 이란성쌍둥이인 올리는 다이어트 중이어서 하루 650 칼로리 이하로 먹으려면 어떤 음식을 얼마나 담아야 하는지 계산하고 있었다. 큰딸 자넷은 빵에 크림치즈를 바르고 있었지만 뭔가 자기 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근방에 있는 마운트 홀리요크 칼리지 신입생이었다. 그리고 마침 시누이인 에스더도 와 있었는데, 그녀의 주특기이자 자랑인 마블 케이크를 갖다 주러 왔다가 점심까지 먹게 된 것이다.


엘라는 식사를 끝내고 해야 할 일이 쌓여있었지만 좀처럼 일어설 수가 없었다. 최근에 식구들이 다 같이 모여서 밥을 먹을 기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때야말로 온 가족이 화합할 수 있는 황금 같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에스더, 엘라가 기쁜 소식 너한테 얘기해줬어?” 갑자기 데이빗이 말했다. “이 사람 굉장히 멋진 일을 하게 됐어.”


엘라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고 소설을 정말 좋아했지만, 졸업 후에 그 분야에서 별로 신통한 일을 하지는 못했다. 여성잡지의 글을 편집하거나 독서클럽에 참석하거나 가끔 지역신문에 서평을 써서 기고하는 정도, 그게 다였다. 뛰어난 문학 평론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에 불타올랐을 때가 있었지만, 어쩌다 보니 인생은 그녀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 놓았고 그녀는 아이 셋을 키우며 끊임없는 집안일에 책임을 져야만 하는 근면한 가정주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불평을 하지는 않았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주부로서, 그리고 반려견 산책인으로서도 그녀는 너무나도 충분히 바빴다. 이 모든 것에 더해서 돈 버는 일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그녀의 대학 친구들은 페미니스트라서 그런지 아무도 그녀가 그렇게 사는 모습을 좋게 봐주지는 않았다. 그래도 엘라는 전업 주부인 엄마로서 만족했고 남편과 함께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음을 고맙게 여겼다. 게다가 그녀는 책에 대한 열정을 결코 버리지 않았고, 스스로 대단한 독서가라고 자부했다.


상황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건 몇 년 전부터였다. 아이들이 자라남에 따라 예전만큼 엄마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그녀는 이제 시간이 남아돌고 그 시간을 함께 보낼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직업을 찾으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다. 데이빗은 그녀의 생각을 지지해주었고 그 문제에 대해 같이 여러 번 의논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원하는 방향의 직업은 매우 드물었고 마침내 찾아내어 지원하기는 했지만 고용주는 언제나 더 젊은 사람, 혹은 경력이 많은 사람을 원했다. 거절당하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그녀는 그냥 직업에 대한 생각 자체를 내려놓게 되었다.


그러나 2008년 5월 생각지도 않게, 수년간에 걸쳐 그녀의 구직을 방해했던 그 모든 장애물들은 일시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마흔 살 생일을 2주 앞둔 어느 날, 엘라는 보스턴에 있는 문학 기관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직장을 연결해준 것은 그녀의 남편이었는데, 자기 고객 중 한 사람을 통했다고 말했지만, 어쩌면 그의 숨겨둔 애인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이, 그렇게 대단한 일 아니야.” 엘라가 서둘러 해명했다. “나는 그저 그 문학 에이전트의 보조일 뿐이야. 그것도 파트타임이고.”

하지만 데이빗은 엘라가 새롭게 맡게 된 그 일을 과소평가하도록 두지 않았다.

“왜 이러셔? 거기 엄청 유명한 에이전시잖아.” 그는 굽히지 않으면서 아내 보고 자랑 좀 하라고 옆구리를 찔렀지만 엘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더욱 진심을 담아 말을 이어갔다. “아주 명망 높은 기관이라고.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 다 일류 대학을 막 졸업한 젊은이거든. 엘라 당신처럼 몇 년 동안 전업주부로 있다가 다시 일에 복귀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오직 당신뿐이잖아. 얼마나 자랑스러워!”

 

엘라는 궁금했다. 혹시 남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아내의 경력이 단절되게 만든 데 대한 죄책감을 느끼는 걸까, 아니면 외도를 조금이나마 정당화하려는 걸까? 지금 남편이 이토록 열광하며 떠들어대고 있는 모습은 이렇게 두 가지 중 하나로만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건 말이지, 정말 대박이야, 대박! 엘라, 당신은 우리의 자랑이야.” 활짝 웃으며 데이빗은 결론지었다.

 “언니는 놀라운 선물이지. 언제나 그랬어.” 이렇게 말하는 에스더의 목소리는 너무나 감성에 젖어있어서 마치 엘라가 식탁을 떠나 영원히 어디론가 가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들렸다.

 모두가 사랑스러운 눈길로 엘라를 보았다. 심지어 걸핏하면 비웃기 잘하는 에비의 표정에도 냉소가 없었으며, 자기 외모 말고는 중요한 게 하나도 없는 올리도 이 순간만큼은 엄마에게 관심을 주는 것 같았다. 엘라는 힘을 짜내어 가족들의 친절함에 대해 고마움을 표현하기는 했지만, 전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극심한 피로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제발 누군가가 대화 주제를 바꿔주기만을 마음속으로 빌고 있었다.  


다행히 큰 딸 자넷이 그녀의 기도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끼어들었다.

“나도 좋은 소식 있어요.”

모두가 자넷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스콧하고 나, 결혼하기로 했어요.” 그녀가 공표했다.

“아-아- 모두들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알아요. 너네 아직 졸업도 안 했잖아, 등등 그런 거겠죠. 하지만 알아주셨으면 하는 건요, 우리 두 사람은 이 엄청난 변화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거예요.”           

조금 전까지 식탁을 포근하게 감싸주었던 온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계속)


튀르키예 작가의 소설의 영문판을 혼자만의 순수한 흥미를 가지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의뢰받지 않은 내 맘대로 번역이죠. 누구에겐가 보여주려는 작업이라기보다는 방대한 양이기에 꾸준히 해나간다는 데에 더 의의를 두고 시작했습니다.  

사실 저는 좋은 번역은 영어실력보다 국어실력이 더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제 자신이 번역을 꽤나 잘한다고 자부합니다. 많은 번역서를 읽으며 이 좋은 내용이 왜 이렇게 이상한 문장으로 표현된 걸까 안타까웠던 일이 많았거든요. 아직은 승인받지 못한 자부심과 소설 자체에 대한 애정을 두 바퀴 삼아 소설 한 편의 번역을 끝까지 달려보겠습니다.

작가의 이름과 영문 제목은 살짝 비밀로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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