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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얼 Dec 17. 2022

낭만적인 게 뭐가 잘못인데?

사랑의 규칙 40가지 - 번역 (2)

올리와 에비가 멍한 눈빛을 주고받는 동안 에스더는 사과주스가 담긴 유리잔을 움켜쥔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데이빗은 식욕을 완전히 잃은 듯 포크를 내려놓고는 연한 갈색 눈을 가늘게 떠서 눈꼬리를 점점 웃는 모양으로 늘려가며 자넷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미소만 띠고 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입은 마치 식초를 한 모금 마신 것처럼 앞으로 쭈욱 내밀고 있었다.  


“굉장하네! 나의 행복에 함께 동참해줄 거라고 기대했는데, 이렇게 차갑고 싸늘한 반응만 주시겠다?” 자넷이 실망을 드러냈다.

“너 방금 결혼하겠다고 말했어.” 데이빗은 마치 자넷이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니 알려줘야겠다는 식으로 다시 한번 짚어주었다.

“아빠, 나도 좀 이른 감은 있다는 거 알아. 하지만 스콧이 나한테 프러포즈했고 난 이미 좋다고 대답했단 말야.”

“하지만 왜?” 엘라가 물었다.

자넷이 그녀를 바라보는 태도에서 엘라는 이런 게 딸이 원하는 질문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딸은 “언제?” 혹은 “어떤 식으로?”라는 질문을 원했으리라. 두 질문 중 어느 것이라도 웨딩드레스를 고르기 위한 쇼핑이 시작된다는 걸 의미했을 테니까. “왜?”라는 질문은 전혀 다른 문제였고 자넷을 완전히 당황하게 만들었다. 

“왜냐면 걔를 사랑하니까, 내 생각엔.” 약간 거만한 어조로 자넷이 말했다. 

“자넷, 엄마 말은 왜 그렇게 서두르냐는 거야. 혹시 임신했니, 아니면 뭐 다른 이유가 있는 거야?” 엘라가 다시 설명했다. 

에스더가 굳은 표정으로 의자에서 들썩이는 게 괴로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제산제를 하나 꺼내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나 삼촌 되겠네.” 에비가 킬킬거리며 말했다.

엘라는 큰 딸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꼭 쥐고는 말했다. “우리한테 솔직하게 다 털어놔도 돼. 알지?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네 편이야.”

“엄마, 그만 좀 해.” 자넷은 손을 빼내고는 탁탁 털었다. “이건 임신이랑은 아무 상관없어. 왜들 이러는지 진짜 당황스럽네.”

“나는 널 도와주려는 거야.” 엘라는 침착하게 말했지만, 요즘 들어 점점 더 침착해지기가 어렵다는 걸 느끼곤 했다. 

“엄마는 날 모욕하고 있어. 내가 스콧하고 결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임신뿐이라는 거잖아, 지금! 내가 걔를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다는 일은 엄마한테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우린 8개월이나 사귀었어.”  

순간 엘라는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왔다. “아 그래? 너는 8개월 만에 한 남자의 됨됨이를 다 알 수 있다는 거구나! 너희 아빠하고 나는 거의 20년 동안 결혼생활을 해왔지만 우린 서로를 다 안다고 절대 말 못 해. 8개월이라는 시간은 이성 관계에서 진짜 아무것도 아냐.”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는 데에 6일밖에 안 걸렸다던데.” 에비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가, 모두의 차가운 눈초리를 느끼고는 즉시 조용해졌다.

큰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생각하느라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데이빗이 긴장감이 높아진 것을 느끼고는 곧 끼어들었다.  

“자넷, 엄마 말은 그러니까 사귀는 거하고 결혼하는 거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는 거야.” 

“하지만 아빠, 그럼 우리는 영원히 계속 사귀기만 해야 돼?” 자넷이 따져 물었다. 

깊은숨을 마시고 엘라가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린 네가 스콧하고 사귀면서 좀 더 성장하기를 바랐어. 진지한 이성 관계를 맺기에는 넌 아직 너무 어려, 자넷.”

“내 생각을 말해줄까, 엄마?” 감정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밋밋한 목소리로 자넷이 말했다. 

“엄마는 엄마의 두려움을 나한테 투사하고 있는 거 같아. 엄마가 어렸을 때 결혼을 했고 내 나이에 애를 낳았다고 해서, 내가 엄마랑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


마치 뺨을 얻어맞은 것처럼 엘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너무도 힘들었던 그녀의 첫 임신과 그래서 자넷이 조산될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깊은 내면으로부터 떠올랐다.  

태어나서부터 어린 시절 내내 자넷을 기르느라 엘라는 모든 에너지를 소진했고, 너무 힘든 나머지 다시 둘째를 갖기까지 6년의 세월이 필요했었다. 

“우리 예쁜 딸, 우린 네가 스콧하고 사귀기 시작했을 때 정말 기뻤어.” 데이빗이 다른 접근을 시도하며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걔 정말 멋진 청년이지. 하지만 네가 졸업하면 혹시라도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잖니? 학교 다닐 때와 졸업하고 나서는 상황이 아주 많이 다르거든.” 

자넷은 이제야 뭔가 알겠다는 듯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했다. “스콧이 유태인이 아니라서 그러는 거예요?” 

데이빗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그는 언제나 열린 생각과 마음의 소유자로 어떠한 종교, 인종, 성별의 차별을 거부하는 교양 있는 아버지라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넷은 가차 없이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엄마에게 돌아서 물었다.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해봐. 만일 스콧이 아론이라는 이름을 가진 유태인이었어도 지금처럼 반대했을 거야?” 

쓰라림과 비난으로 온통 가시 돋친 자넷의 목소리를 들으며 엘라는 딸의 내면에서 건져 올릴 수 있는 더한 감정들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다.

  

“자넷,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솔직하게 말할게. 젊다는 것과 서로 사랑한다는 게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다운 일인지 알아. 믿어줘, 엄마도 알아. 하지만 다른 성장배경을 가진 사람과 결혼한다는 건 엄청난 도박이야. 우린 너의 부모로서 네가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도와줄 의무가 있어.”

“엄마 아빠가 생각하는 올바른 선택이 나를 위해서도 올바른 선택이라는 건 어떻게 알 수 있는데?”

엘라는 약간 당황했다. 그녀는 편두통이 생길 것 같아 한숨을 쉬며 이마를 문질렀다. 

“나 스콧을 사랑해, 엄마. 이건 엄마한테 아무 의미도 없는 얘기야? ‘사랑’이란 단어를 아예 잊어버렸어? 스콧은 내 심장을 뛰게 한다구. 난 걔 없이 못 살아.”     

엘라는 낄낄대며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딸의 감정을 놀려대겠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런 게 아닌데도 그 웃음소리는 꼭 그렇게 들릴 만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그녀는 극심하게 초조해졌다. 딸과는 전에도 수없이 싸웠다. 하지만 오늘은 딸이 아닌 뭔가 다른 것과 싸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더 크고 강한 무엇. 

“엄마는 사랑을 해본 적이나 있어?” 자넷은 경멸의 의미를 담은 어조로 쏘아붙였다. 

“제발! 정신 차려. 망상에서 벗어나서 현실을 직시해, 좀! 알았어? 너는 지금 너무...”

엘라는 창문에 시선을 꽂은 채 강도 높은 단어를 찾다가 결국 “... 낭만적이야!”라고 끝맺고 말았다.     

“낭만적인 게 뭐가 잘못인데?” 자넷이 다시 공격적으로 물었다. 

그러게 말이다. 낭만적인 게 뭐가 잘못인지 엘라는 알 수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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