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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얼 Dec 19. 2022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요

사랑의 규칙 40가지 - 번역 (3)

‘낭만’이 엘라를 괴롭히게 된 건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마음 한구석에 남겨둔 채 그녀는 다시 딸을 설득했다. “왜 이러니 자넷, 지금이 어떤 시댄데! 생각해 봐. 여자들이 사랑에 빠진 남자와 결혼하는 거 같아? 결혼을 진짜 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좋은 아버지와 믿을 수 있는 남편이 될 남자를 선택해. 사랑이라는 건 쉽게 왔다가 또 언제 가버릴지 모르는 달콤한 감정일 뿐이야.”

엘라가 말을 마치고 남편에게 얼굴을 돌리자 데이빗은 손을 올려 느리게, 마치 물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박수를 쳤다. 그의 눈엔 자기 아내가 처음 본 사람처럼 낯설게 보였다.

“나는 엄마가 왜 이러는지 알아.” 자넷이 응수했다. “엄마는 나의 행복과 나의 젊음을 질투하고 있는 거야. 나도 엄마처럼 불행한 가정주부가 되길 바라겠지. 나를 엄마 모습과 똑같이 만들고 싶은 거지.”

엘라의 가슴 밑바닥으로 거대한 돌덩이가 쿵 하고 내려앉았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충격이었다. 나는 불행한 가정주부였나? 실패한 결혼의 덫에 걸려 알맹이는 다 빠져나가고 껍데기만 남은 엄마인가? 이게 아이들 눈에 비친 엄마의 모습인가? 그리고 남편에게도? 친구들과 이웃들에게도 그렇게 보였을까? 갑자기 엘라는 모두가 자기를 불쌍하게 여기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지며 숨이 막혀왔다.

“엄마한테 사과해.” 데이빗이 노한 얼굴로 자넷에게 말했다.

“됐어. 그런 거 바라지 않아.” 엘라가 잘라 말했다.

자넷은 그런 엄마를 비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냅킨을 던지고 식당을 나가 버렸다.

잠시 후 자넷에 대한 암묵적 동조인지 아니면 그냥 어른들 얘기가 지루해서였는지 올리와 에비도 조용히 뒤따라 나갔다. 에스더도 마지막 제산제를 열심히 씹으면서 우물쭈물 변변찮은 핑계를 대고는 자리를 떠났다.      


식탁에는 엘라와 데이빗만 남았다. 끔찍한 어색함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 간극에 존재하는 공허는 자넷과도 상관없고 아이들 누구와도 상관없다는 것을 두 사람 다 알고 있었고, 그래서 엘라는 그 사실을 마주하기가 고통스러웠다.         

데이빗은 괜히 옆에 놓았던 포크를 들어 검사라도 하려는 듯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한 게 아니라는 말이지?”

“아- 왜 이래, 그런 뜻 아니었어.”

“그럼 무슨 뜻인데?” 데이빗은 여전히 포크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난 우리가 결혼했을 때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나 당신 사랑했어.” 엘라는 이렇게 말했지만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는.”

“그럼 언제부터 사랑하지 않게 된 거야?” 무표정으로 데이빗이 물었다.

엘라는 놀라서 남편을 바라보았다. 태어나서 한 번도 자기 자신의 표정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처음으로 거울 속을 들여다본 느낌이었다. 그녀는 대답하고 싶었으나 적절한 단어도 생각나지 않았고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남편과 자기가 걱정해야 할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그들 자신임을. 하지만 그들은 둘 다 똑같이 잘도 회피해왔다. 하루하루가 그저 지나가며 일상이 반복되고 시간이 흘러 어쩔 수 없는 무기력으로 향하는 과정을 그대로 놔두는 것이 그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엘라는 쌓이고 쌓인 슬픔을 더이상 억누를 길 없어 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이미 슬픔이 자기 존재의 일부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데이빗은 괴로워하며 돌아섰다. 엘라가 남편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만큼 데이빗도 아내가 우는 모습을 보는 것이 싫었다. 두 사람 다 잘 알고 있었다. 그때, 다행스럽게도 전화벨이 울렸다.


데이빗이 받았다. “여보세요... 네, 있어요. 잠시만요.”

엘라가 얼른 추스르고는 있는 힘을 다해 밝은 목소리를 끌어올렸다.

“네, 여보세요, 엘라입니다.”

“안녕하세요. 저 미셸이에요. 주말인데 전화드려서 죄송해요.”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재잘거렸다. “스티브 부장님이 어제 선생님께 확인해보라고 하셨는데, 제가 깜박했거든요. 저 혹시 그 원고는 읽어보셨어요?”

“아...” 엘라는 해야 할 일이 이제야 기억나서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문학 기관에서 엘라가 맡은 첫 번째 업무는 한 무명의 유럽 작가가 쓴 소설을 읽고 나서 광범위한 보고서를 쓰는 일이었다.    

“부장님껜 걱정 마시라고 전해주세요. 벌써 읽기 시작했어요.” 엘라는 거짓말을 했다. 야망 있고 고집이 센 미셸을 첫 번째 작업에서부터 화나게 할 수는 없었다.

“잘됐네요. 그래, 어때요?”

엘라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잠시 멈칫했다. 그녀는 그 원고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기껏해야 유명한 신비주의 시인 ‘루미’의 삶을 중심으로 한 역사소설이라는 것 정도, 그리고 그 시인이 “이슬람 세계의 셰익스피어”로 불렸다는 게 그녀가 지금 알고 있는 전부였다.

“아, 뭐랄까 굉장히... 신비로워요.” 엘라는 농담으로 받아주길 바라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하지만 미셸은 어디까지나 사무적이었다. “그래요.” 그녀는 딱딱하게 말했다. “이거 말이죠, 작업에 좀 더 집중하셔야 될 거예요. 이 소설에 대한 광범위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더 많이 소요될 수 있어요. 왜냐면 이런 소설은... ” 미셸의 말소리가 끝이 흐려지면서 먼 웅얼거림이 되었다. 엘라는 지금 미셸의 모습이 어떨지 상상이 갔다. 떠맡은 작가들 중 한 명의 리뷰를 읽는 사이사이 이메일을 체크하다가 참치 샌드위치를 한입 문 채로 우물거리며 손톱 정리를 하는 등, 여러 가지의 업무를 동시에 처리하느라 엎치락뒤치락하는 모습으로 통화를 하고 있을 게 눈에 선했다.

잠시 후 미셸이 물었다. “여보세요? 듣고 계세요? 엘라?”

“네. 듣고 있어요.”

“그래요. 여기 좀 정신이 없어서 더 길게 통화는 못하구요, 아무튼 꼭 명심하셔야 돼요. 마감은 3주 후예요. 아시겠죠?”

진실을 말하자면, 엘라는 그 원고를 읽고 평가하는 작업을 정말 하고 싶은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처음엔 열정이 솟았고 자신도 있었다.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미출판 원고를 제일 처음으로 읽고 그 작가의 운명에 작은 영향이라도 미칠 수 있다는 데에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13세기는 너무 동떨어진 시대에다 수피즘(Sufism)도 그녀의 삶과는 아무 상관없는 주제라서 과연 자신이 흥미를 갖고 집중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미셸이 엘라의 머뭇거림을 눈치챘는지 이렇게 물었다. “무슨 문제 있어요?”

대답이 없자 미셸은 더 바짝 달려들었다. “문제가 있다면 나한테 말해요. 괜찮아요.”

잠깐의 침묵 뒤에 엘라는 사실대로 말하기로 결심했다.

“사실은 그냥 내가 확신이 안 서서요. 요즘 내가 역사소설에 집중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내 말은, ‘루미’라는 시인과 이슬람 뭐 이런 것들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닌데, 하지만 그 주제가 나한텐 너무 이질적이에요. 혹시 다른 소설을 맡겨주시면 안 될까요? 내가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그런...”

“그건 너무 편향된 접근법이네요.” 미셸이 말했다. “내가 잘 아는 내용에 대한 책일수록 더 잘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천만에요! 그럼 선생님은 매사추세츠에 살고 있으니까 매사추세츠를 배경으로 한 소설만 작업하실 수 있겠네요?”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엘라는 이렇게 말하면서, 문득 자신이 오늘 오후에 이 비슷한 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남편 역시 그걸 눈치챘는지 보려고 슬쩍 곁눈질을 했지만, 데이빗은 해독 불가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 거의 모든 시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과는 아무 상관없는 책을 읽어야 돼요. 그게 바로 우리 일이에요. 바로 이번 주에 내가 편집을 끝낸 책은 테헤란에 있는 매춘업소를 운영하다가 해외로 도피한 이란 여성에 대한 책이었어요. 내가 그 작가한테 원고 돌려주고 이란에 있는 에이전시나 찾아가 보라고 했어야 되나요?”

“아뇨. 그건 아니죠. 절대 그건...” 이렇게 웅얼거리며 엘라는 멍청하고 초라한 자신을 느꼈다.

“물리적인 거리나 문화적 차이를 초월하여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것이 훌륭한 문학의 힘 아닌가요?”         

“당연히 그렇죠. 맞습니다. 내가 한 말은 없었던 걸로 해주세요. 마감 전에 평가서 받아보실 수 있게 확실히 하겠습니다.” 엘라는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덜 떨어진 생명체로 취급한 미셸을 미워하면서,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을 허용한 자기 자신을 미워하면서 이렇게 인정했다.

“아주 좋아요. 그게 올바른 정신이죠!” 미셸은 높은 소프라노 목소리로 결론지었다.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선생님이 아셔야 될 게, 지금 선생님이 하시는 일을 원하는 사람들이 저 밖에 수십 명이나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게다가 그 사람들 다 선생님 나이의 절반밖에 안 되는 팔팔하게 젊은 사람들이구요. 이렇게 생각하면 동기부여가 좀 되실 거예요.”


엘라는 전화를 끊었다. 데이빗은 묵묵하고 엄숙한 얼굴로 엘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중단한 대화를 다시 이어가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엘라는 애초에 그들이 걱정했던 게 딸의 미래였다면 더이상 그 문제를 들쑤시고 싶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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