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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얼 Dec 23. 2022

알려지지 않은 작가

사랑의 규칙 40가지 - 번역 (4)

그날 늦게 엘라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현관 앞 흔들의자에 혼자 앉아 노쓰햄튼의 짙은 오렌지빛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은 마치 손이 닿을 것처럼 가깝게 펼쳐져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소용돌이치는 내면의 소음에 지칠 대로 지쳐 이젠 귀먹은 듯 먹먹해져 버렸다. 이번달 신용카드 대금, 다이어트한답시고 형편없이 먹고 있는 올리, 학교 성적이 너무 엉망인 에비, 시누이 에스더와 그 불쌍한 케이크, 반려견 스피릿에게 진행되는 노화, 자넷의 결혼 문제, 몰래 바람피우는 남편, 사랑이 없는 그녀의 삶... 하나씩 하나씩 엘라는 머릿속 작은 상자 안에 넣고는 잠가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봉투에서 그 원고를 꺼내 그 무게를 가늠해보려는 듯 손에 들고 흔들어 보았다. 맨 앞장에 인디고블루 색 잉크로 제목이 씌어있었다 : 달콤한 신성모독.

엘라가 들은 바에 의하면, 네덜란드에 살고 있는 ‘A. Z. 자하라’라는 이 작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잘 아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의 원고는 암스테르담에서부터 그 문학기관으로 송달되었는데, 봉투 안에는 원고와 함께 그림엽서가 한 장 들어 있었다. 앞면은 눈부신 분홍, 노랑, 보라색 튤립 꽃밭 사진이었고, 뒷면엔 섬세한 손글씨로 인사를 적어놓았다.    

       

친애하는 담당자 선생님께     

암스테르담에서 인사를 보냅니다. 선생님께 보낸 소설은 13세기 소아시아의 코니아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이야기가 나라와 문화와 세기를 넘어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선생님께서 <달콤한 신성모독>을 읽어보실 시간이 충분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슬람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이자 존경받는 영적 지도자였던 ‘루미(Rumi)’ 그리고 타브리즈(Tabriz:이란 서북부의 도시)의 ‘샴스’, 이 두 사람 사이의 기념비적인 우정에 대한 역사적이고 신비로운 이야기입니다. 샴은 금욕생활을 서약한 이슬람교 집단의 일원인 ‘데르비시(Dervish)’였는데 종교적으로 전형적이지 않았던 탓에 갖가지 소문과 의구심에 싸인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입니다.

선생님께 늘 사랑이 함께 하기를 빕니다.      

A. Z. 자하라 드림.      


엘라는 이 그림엽서가 문학 에이전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는 것을 감지했다. 하지만 스티브 부장은 아마추어 작가의 작품을 읽을 만한 시간이 없었기에 조수인 미셸에게 넘겼고, 미셸은 다시 그녀의 새로운 조수인 엘라에게 넘긴 것이다. 이게 바로 <달콤한 신성모독>이 엘라의 손에 들어오게 된 경위다.

이 소설이 여느 책과 조금도 비슷하지 않으리라는 것, 그리고 그녀의 인생을 바꾸어놓을 책이 되리라는 사실을 엘라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이 소설을 읽어나가는 동안 그녀의 인생은 새롭게 씌었다.

엘라는 첫 장을 넘겼다. 작가를 소개한 글이 있었다.     

'A. Z. 자하라는 암스테르담에 살면서 책과 고양이, 거북이와 함께 살고 있으며 종종 여행을 다닌다. <달콤한 신성모독>은 그의 첫 소설로서 아마도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소설가가 되려는 의도 같은 건 없이 다만 위대한 철학자이자 시인, 신비주의자였던 루미와 그가 사랑했던 태양, 타브리즈의 샴스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존경심에서 글을 썼기 때문이다.'      

엘라의 눈이 빠르게 다음 줄로 내려갔을 때 왠지 익숙하게 들리는 문장을 발견했다.     

'물론 사람들은 사랑이란 쉽게 왔다가 또 언제 가버릴지 모르는 달콤한 감정일 뿐이라고들 한다.'      

이건 바로 그날 그녀가 식탁에서 딸에게 했던 말과 똑같은 문장이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엘라는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녀는 얼어붙은 듯 꼼짝없이 서서, 이 우주, 아니면 이 작가, 혹시 이 남자의 정체가 작가가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뭔가의 신비한 힘이 그녀를 감찰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이 작가는 그녀를 독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녀가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는 가능성은 그녀에게 불안과 흥분을 동시에 선사했다.      

'여러 면에서 21세기는 13세기와 닮았다. 두 시대 모두 전례 없는 종교적 충돌, 문화적 편견과 몰이해, 그리고 타인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전반적으로 만연했던 시기로 기록될 것이다.  이와 같은 시대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랑이 필요하다.'          

갑자기 차갑고 강한 바람이 그녀가 있는 쪽으로 불어와 현관에 쌓인 낙엽들이 흩어져 날렸다. 석양의 아름다운 빛이 서쪽 수평선을 향해 가라앉고 있었고 공기는 메마르게 느껴졌다.      

'사랑은 삶의 목적이며 본질이기 때문이다. 루미가 상기시켜 주었듯이, 사랑은 사랑을 기피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을 움직인다. 심지어 ‘낭만적’이라는 단어를 사랑을 부정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들까지 말이다.'      

엘라는 이 부분을 읽으며 마치 “사랑은 모든 사람들을 움직이며 심지어 노쓰햄튼에 사는 중년 부인 엘라 루빈스타인까지 움직인다.”라는 문장을 읽은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원고를 집어던지고 집안으로 들어가 미셸에게 전화를 걸어 이 보고서 작업은 절대 못하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깊은숨을 내쉬고는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읽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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