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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얼 Feb 25. 2023

땅 - 샴스(4)

사랑의 규칙 40가지 - 번역 (19)


바그다드, 1243년 12월 18일    

  

꽁꽁 얼어 대롱대롱 매달린 고드름과 눈 덮인 길을 너머, 저 멀리 배달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카이세리에서 왔다고 말하자 데르비시들 사이에는 소란이 일었다. 그들은 일 년 중 이맘때 누군가 방문하는 일은 이 추운 날씨에 달콤한 포도가 열릴 확률보다 적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달원이 눈 폭풍을 뚫고 올만큼 긴급한 편지를 갖고 왔다는 사실은 매우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거나, 아니면 아주 중요한 일이 생겼거나, 둘 중의 하나를 의미했다. 

배달원이 왔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데르비시 집회소 전체에 퍼졌고, 모두들 바바 자만의 손에 넘겨진 그 편지의 내용이 무엇일까 궁금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신비의 망토에 싸인 채 그 어떤 실마리도 보여주지 않았다. 말없이 생각을 곱씹고 또 조심스럽게 경계하면서도 그는 올바른 결정에 도달하는 것이 너무도 어려워서 며칠 동안이나 양심과 싸우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는 내내 바바 자만을 가까이에서 관찰하도록 나를 부추긴 것은 순전히 호기심만은 아니었다. 나는 그 편지가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나 개인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내면 깊이에서부터 감지하고 있었다. 나는 수많은 밤들을 기도실에서 보내면서 길을 가르쳐주는 아흔아홉 신의 이름을 낭송했었는데, 그때마다 매번 하나의 이름이 두드러졌다 : 알-자바르. 그의 통치권 안에서 그의 뜻이 아닌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게 하는 신. 

그 후 며칠 동안 집회소에는 터무니없는 억측이 난무했지만, 나는 혼자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두터운 눈의 담요 아래 포근하게 감싸인 위대한 자연을 관찰했다. 마침내 어느 날 우리는 부엌의 놋쇠 종이 땡땡땡땡 울리는 소리를 들었고 그건 긴급회의를 위해 모두를 소집하는 소리였다. 캉카(Khanqah:이슬람 특유의 건축구조)의 가운데 가장 큰 방에 들어서니, 초보수사와 비슷한 상급의 데르비시들 모두가 모여 큰 원을 그리고 앉아있었다. 원의 가운데에 입술을 가지런히 오므리고 눈을 흐릿하게 뜬 바바자만이 보였다.        

목을 가다듬은 후, 그는 말했다. “신의 이름으로 인사드립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을 소집한 이유가 궁금하시겠지요. 제가 받은 편지에 관한 것입니다. 어디에서 온 편지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저의 관심을 대단히 중요한 주제로 이끌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바바 자만은 잠시 멈추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피곤하고 야위고 창백해 보여서 마치 요 며칠 사이에 갑자기 늙어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다시 말을 이어갈 때 보기와는 달리 목소리에서 결단력이 느껴졌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도시에 박식한 학자 한 분이 계십니다. 그는 언어에 능하지만, 시인이 아니기에 은유에는 서툴지요.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존경받고 칭송받는 분이지만, 그 자신은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훨씬 뛰어넘는 이유들 때문에, 우리 집회소에서 한 사람이 그에게 가서 그의 동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 심장이 옥죄어 왔다.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나는 규율 중의 하나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로움과 고독은 별개의 것이다. 외로울 때 우리는 우리가 올바른 길로 가고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기 쉽다. 외로움보다는 고독이 더 낫다. 고독은 혼자 있으면서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나의 거울이 되어줄 한 사람을 찾는 것이 최상이다. 기억하라, 오직 다른 사람의 마음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나 자신을 볼 수 있고, 내 안에서 신의 실재를 깨달을 수 있다.”

바바 자만은 말을 이어갔다. “저는 여러분 중 누가 이 영적인 여정에 자원할 것인지를 묻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겁니다. 물론 제가 누군가를 지목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내 의무를 벗어나서 수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랑의 이름으로, 사랑의 힘으로 되는 일이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한 젊은 데르비시가 발언해도 되는지 허락을 구했다. “그 학자가 누구입니까?”

“그곳으로 가겠다고 한 사람에게만 얘기해 줄 겁니다.”

이 말을 듣고 몇몇 데르비시가 흥분으로 들떠서 손을 들었다. 아홉 명의 후보자가 생겼다. 나도 손을 들어서 도합 열 명이 되었다. 바바 자만이 후보자를 마감하기 전에 다시 한번 주의를 집중시키려고 손을 흔들었다. 

“여러분이 결정을 하기 전에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이 여정에는 심각한 위험과 전례 없는 역경이 따를 것이며 다시 돌아온다는 보장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 즉시 모두가 손을 내렸고 나만 남았다. 

바바 자만은 나를 똑바로 마주하면서 처음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나의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와 나의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는 그가 처음부터 내가 유일한 자원자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이해했다. 

“타브리즈의 샴스.” 그는 마치 내 이름이 그의 입에 묵직한 맛을 남기기라도 한 것처럼 느리고 어둡게 말했다. “당신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여기에 응할 완전한 자격이 없어요. 당신은 우리의 손님이니까요.” 

“어째서 그게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그는 한참을 침묵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갑자기 일어서서 결론을 내렸다. “이 사안은 잠시 중단합시다. 봄이 오면 그때 다시 얘기하기로 하지요.” 

내 가슴에서 반항심이 끓어올랐다. 바바 자만은 바로 이 소명이 내가 애초에 바그다드에 와야만 했던 단 하나의 이유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나의 운명을 완성할 기회를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저는 지금 당장 갈 준비가 되어있는데 뭘 기다리라는 거죠? 도시의 이름과 그 학자의 이름을 말해주시기만 하면 전 떠나겠어요!” 나는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내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더 이상의 토론은 없소. 회의는 끝났습니다.”      

길고 혹독한 겨울이었다. 정원은 얼어붙어 굳었고, 내 입술도 굳었다. 그 일 이후 석 달 동안 나는 누구와도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날마다 나는 오랜 시간 시골길을 산책하면서 나무에 꽃이 피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눈이 내린 다음 더 많은 눈이 내렸다. 지평선 어디에도 봄은 없었다. 그래도 밖에서는 기운이 없었지만, 나의 내면엔 감사와 희망이 남아있었고 또 하나의 규율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다. 나의 상황에 딱 맞는 규율이었다. “우리 인생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어떤 문제가 있어 보이든, 절망의 곁으로 가지 마라. 모든 문이 닫힐 때, 신은 오직 너를 위한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다. 감사하라! 모든 일이 잘될 때 감사하기는 쉽다. 수피(Sufi)는 받은 것에만 감사할 뿐 아니라 거절당한 것에도 감사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쌓인 눈 아래에서 달콤한 노래처럼 환하게 고개를 내민 눈부신 색깔이 나의 시선을 붙들었다. 자잘한 라벤더 꽃으로 덮인 덤불 클로버였다. 기쁨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집회소로 돌아와 연갈색 머리의 초보 수사와 마주치자 나는 명랑하게 인사를 건넸다.  말없이 무뚝뚝한 내 모습만 보아왔던 그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웃어, 꼬맹아.” 나는 외쳤다. “봄기운이 보이잖아?” 

그날로부터 풍경의 변화는 눈에 띄게 빨라졌다. 마지막으로 내린 눈이 녹고, 나무에는 봉오리가 맺히고, 참새와 굴뚝새가 돌아왔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상큼한 향기가 공기 중에 가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날 아침 다시 놋쇠 종소리를 들었다. 이번엔 내가 제일 첫 번째로 회의 장소에 도착했다. 모든 사람들이 다시 한번 바바 자만을 둘러싼 큰 원을 그리고 앉았으며, 사랑만 빼고 모든 지식을 겸비한 뛰어난 이슬람 학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역시나 자원하는 사람은 없었다. 

“샴스가 유일한 지원자군요.” 그는 바람의 울림처럼 가늘고 높은 목소리로 공표했다. 

“하지만 결론을 내기 전에 가을까지 기다려봅시다.”

나는 경악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3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려서 이제야 겨우 떠날 준비가 되었는데, 그는 지금 나에게 출발을 또다시 6개월 뒤로 연기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철렁 내려앉은 가슴을 붙들고 나는 항의하고 따지면서 제발 어느 도시인지 그 학자가 누구인지 말해달라고 애원했지만, 바바 자만은 역시 거절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기다리기가 조금 더 수월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더 이상의 연기는 없을 것 같았다. 겨울부터 봄까지는 참고 견뎠으니, 이제 봄부터 가을까지는 나의 불을 간직할 것이다. 바바 자만의 거절은 나를 낙심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나의 정신을 고양시켰고 결심을 더욱 깊어지게 했다. 또 하나의 규율은 이렇게 말한다. 

“인내는 수동적으로 견디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충분한 선견지명을 가지고 어떤 과정의 마지막 결과를 믿는 것을 의미한다. 인내란 무엇인가? 가시를 보면서 장미를 보는 능력이고, 밤을 보면서 새벽을 보는 능력이다. 조급함은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 근시안적인 태도에서 나온다. 신을 사랑하는 자는 결코 인내심이 바닥나지 않는다. 차오르는 달이 보름달이 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가을이 되어 세 번째로 놋쇠 종이 울렸다. 나는 이제 마침내 일이 결정되리라는 확신에 차서 서두르지 않고 걸어갔다. 바바 자만은 그동안 더 창백하고 더 약해져서, 마치 그에게 더 이상 아무런 기력도 남아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손을 든 나를 보았을 때 눈길을 거두지도 않았고 안건을 중단시키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이제 결단을 내렸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좋습니다, 샴스. 당신이 그 여정을 시작할 오직 단 한 사람이라는 것에 의문의 여지가 없군요. 내일 아침 길을 떠나세요. 인샬라.(inshallah)”

나는 그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긴 시간을 지나 마침내 나는 내 영혼의 동반자를 만나러 가게 된 것이다. 

바바 자만은 나를 보며, 마치 하나뿐인 아들을 전쟁터로 떠나보내는 아버지처럼 따뜻하고 사려 깊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긴 녹갈색 가운 안쪽에서 봉인된 편지를 꺼내 나에게 건네주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모두가 그 뒤를 따랐다. 홀로 방에 남은 나는 밀랍 봉인을 뜯었다. 그 안에는 우아한 필체로 쓰인 두 개의 정보가 있었다. 도시의 이름, 그리고 학자의 이름. 나는 콘야로 가서 루미라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나는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아는 한 그는 유명한 학자일 테지만, 나에게 있어 그는 완전히 신비 그 자체였다. 나는 그의 이름의 철자 하나하나를 말해보았다. 힘차고 선명한 R, 유려한 U, 용감하고 자신감 넘치는 M, 그리고 신비로우면서도 의문이 풀리는 I. 

각각의 글자들을 모은 그의 이름을 나는 반복해서 부르고 또 불렀다. 그 이름이 내 혀에서  사탕처럼 달콤하게 녹아내리면서, “물”이나 “빵” “우유”처럼 친숙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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