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주얼 Feb 26. 2023

땅 - 엘라(5)

사랑의 규칙 40가지 - 번역 (20) 

노쓰햄튼, 2008년 5월 22일


새하얀 솜이불속에서 엘라는 녹초가 된 느낌으로 목이 아픈 것을 삼켰다. 평소 자기 체력의 한계를 넘어서 요 며칠 동안 연속해서 늦게까지 안 자고 술을 마셨더니 그 값을 톡톡히 치르는 중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아침 식사를 준비한 다음 쌍둥이와 남편과 함께 식탁에 앉았다. 학교에서 가장 멋진 차가 뭐였느니 하는 아이들의 수다를 들으며 관심 있어하는 척 최선을 다했지만 그녀는 사실은 당장이라도 침대로 돌아가 눕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갑자기 올리가 엄마에게 고개를 돌리고 물어보았다. “에비가 그러는데 언니가 이제 집에 다신 안 들어올 거라는데, 정말이야, 엄마?” 올리의 목소리에는 비난과 의심이 섞여 있었다.

“그럴 리가. 당연히 아니지. 쟈넷하고 내가 좀 싸운 건 너희들도 알잖아.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 엘라가 대답했다. 

“엄마가 스콧한테 전화해서 누나를 차버려 달라고 부탁했다는 건 진짜예요?” 

이런 주제가 꽤나 재밌는지 에비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물었다. 

엘라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남편을 슬쩍 보니, 데이빗은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는 뜻으로 눈썹을 치켜뜨고 양손을 옆으로 벌려 보였다. 

엘라는 얼른 마음을 가다듬고 아이들에게 지시를 내릴 때면 쓰곤 하는 권위가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다 맞는 얘기는 아니야. 내가 스콧한테 전화를 하기는 했지. 하지만 쟈넷을 차 달라고 말한 적 없어. 내가 한 얘기는, 결혼을 너무 서두르지 말았으면 한다, 이게 전부야.”

“난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야.” 올리가 확신에 차서 공표했다. 

“오-예, 뭐 너랑 결혼하고 싶어 하는 남자가 어디 있기는 하고?” 에비가 맞받아쳤다. 

쌍둥이가 서로 티격태격하는 것을 듣고 있는 동안 엘라는 자신의 입가에 불안한 미소가 장착되어 있는 것을 느꼈다. 왜 그런지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소를 짓지 않으려고 애써봐도 마치 피부 한 겹 아래 아예 조각된 것처럼 미소가 계속 남아있었고 가족들을 문까지 배웅하면서 좋은 하루 보내라고 인사할 때까지도 그 웃음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돌아와 식탁에 혼자 앉게 되자, 그제야 그 미소를 없앨 수가 있었다. 마음껏 부루퉁하게 있어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허용하자마자 미소가 사라진 것이다. 부엌은 마치 쥐떼에게 공격받은 것 같은 몰골이었다. 반만 먹은 스크램블드 에그, 먹다 남긴 씨리얼 그릇, 더러워진 머그컵들이 카운터에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반려견 스피릿이 바닥에 얼굴을 대고 산책 나가자고 조르고 있었다. 엘라는 커피를 두 잔 마신 다음 멀티비타민까지 마셨는데도, 스피릿을 겨우 정원으로 데리고 나가 몇 분 동안만 있다가 들어와야 했다.      

집안으로 들어오니 전화 응답기에 빨간 불이 들어와 있었다. 엘라가 버튼을 누르자, 감격스럽게도 쟈넷의 낭랑한 목소리가 방을 채웠다. 

“엄마, 듣고 있어? 없나? 아님 없는 척하는 건가?” 그녀가 킬킬거렸다. “건 그렇고, 나 정말 화 많이 났었어. 엄마 얼굴 다신 안 보려고 할 정도로. 근데 지금은 화가 좀 가라앉았어. 있지, 엄마가 진짜 잘못한 건 맞아. 어떻게 스콧한테 전화를 할 수가 있어? 그치만 엄마가 왜 그랬는지 이해는 가. 엄마, 이젠 엄마가 매 순간 나를 보호해주려고 하지 않아도 돼. 나는 이제 더 이상 인큐베이터 안에서 보호받아야 할 미숙아가 아니라구. 과잉보호 좀 하지 마! 그냥 나대로 살게 놔줘, 응?”

엘라의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쟈넷이 막 태어났을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온통 빨갛고 슬퍼 보이는 피부, 거의 투명한 작은 손가락의 주름들, 호흡기 튜브를 꽂은 가슴 ― 세상에 나오기엔 너무나도 준비가 안 된 아기였다. 엘라는 얼마나 많은 밤들을 뜬눈으로 지새우면서 아기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여가며 아직 살아있는지 앞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확인했던가. 

“그리고 엄마, 하나 더 얘기할 거 있는데...” 쟈넷은 조금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사랑해.” 

그 말에 엘라는 깊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리고 아지즈가 보낸 이메일이 생각났다. 소원 나무가 그의 바람을 들어주었다. 적어도 시작은 된 것이다. 엘라의 전화에 쟈넷이 응답을 남겼으니 쟈넷은 자기가 할 바는 한 것이다. 이제 화해의 나머지는 엘라가 완성해야 한다. 그녀는 딸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쟈넷은 도서관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음성 메시지 들었어, 쟈넷. 엄마가 정말 미안해. 너한테 사과하고 싶어.”

잠깐의 침묵 뒤에 쟈넷이 말했다. “괜찮아, 엄마.” 

“아냐, 내가 잘못했어. 너의 감정을 내가 더 존중했어야 하는데...”

“우리 지나간 일은 다 털자. 그럴 수 있지?” 쟈넷은 마치 자기가 엄마고, 엘라가 반항하는 딸인 것처럼 말했다. 

“그래, 우리 딸.”

“근데 엄마... ” 물어보기가 겁난다는 듯 쟈넷이 비밀스러운 어조로 목소리를 낮추었다. 

“엄마가 저번에 했던 말, 그게 좀 걱정돼서 그러는데... 진짜야? 엄마 정말 불행해?”

“아니야. 안 그래.” 엘라는 지나치게 빨리 대답했다. “이렇게 예쁘고 소중한 세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가 어떻게 불행할 수가 있겠어?”

하지만 쟈넷은 미심쩍은 듯 말했다. “내 말은, 아빠하고 말이야.” 

엘라는 진실을 빼고 어떤 말로 둘러대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너희 아빠하고 나는 정말 오랫동안 결혼생활을 했잖아. 그렇게 긴 세월이 지나도록 사랑이 남아있기는 어려워.”

“이해는 해...” 쟈넷이 기묘하게 대답했다. 어쩌면 엘라가 그렇게 느낀 것인지도 모른다. 

전화를 끊고 엘라는 사랑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시간을 가졌다. 그녀는 흔들의자에 발을 올리고 앉아, 상처받고 냉소적이었던 자신이 어떻게 해야 사랑을 다시 경험할 수 있을까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사랑은 이렇게 미친 듯이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시(詩)를 찾거나 혹은 살아갈 이유를 찾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사랑 찾기를 포기한 사람들은 어떨까?

그날이 다 가기 전에 엘라는 아지즈에게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아지즈 (이렇게 써도 될는지요...)      


친절하고 따뜻한 당신의 답장을 받고 고마웠습니다. 당신 덕분에 우리 가족이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었어요. 딸과 나는 간신히 그 지독한 오해를 털어버릴 수 있었답니다. 당신이 친절하게도 우리의 갈등을 ‘오해’라고 불러줬지요. 

한 가지는 당신이 옳았어요. 나는 두 가지 극단, 공격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어요. 사랑하는 이들의 삶에 너무 많이 간섭하거나, 아니면 그들의 행동 앞에서 그냥 무력해지고 말아요. 

승복(承服)에 관해서는, 당신이 말한 것과 같은 그런 평화로운 항복을 경험해 본 적이 없어요. 솔직히 수피에게 요구되는 그런 미덕을 내가 갖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하지만 이 얘기는 해줘야겠네요. 정말 신기하게도 내가 요구하고 간섭하기를 포기하니까 그제야 쟈넷과 나 사이의 문제가 바라던 대로 풀리더라고요. 당신에게 아주 많이 고마워요. 나 또한 당신을 위해 기도할게요. 신에게 노크한 지 너무 오래돼서 아직도 같은 자리에 계신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이런... 내가 당신 소설 속에 나오는 여관주인처럼 말한 것 같은데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그 정도로 신랄하진 않아요. 적어도 아직까진 아니에요.     

  

노쓰햄튼에서, 당신의 친구, 엘라.  

매거진의 이전글 땅 - 샴스(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