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식사부터 자기 전까지
브런치스토리 작가 입회 허가를 받고 호기롭게 '브런치북'을 발행했더랬습니다. 비싼 P.T.를 끊어두면 어쩔 수 없이 헬스장으로 향해야 하는 것 마냥, 매주 월요일 브런치북 발행일임을 알면 제 몸뚱이가 저절로 키보드 앞에 앉혀질 줄로만 알았습니다. '16개월 아기의 하루' 오전 편이 '18개월 아기의 하루' 오후 편으로 이어지게 되었네요. 투명한 레이어에 저와 아기의 하루를 그려보는 상상을 합니다. 하루하루 쌓인 레이어들을 모두 겹쳐보아도 그림이 크게 달라지지 않기에 이맘때쯤 아가의 한 달여의 시간은 그저 며칠로만 느껴집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연재일을 지키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변명이지요.
꾸준한 연재를 이어가는 작가님들께 경의를, 이런 부족한 작가의 브런치북에 기꺼이 구독을 눌러주신 분들께는 감사를 표합니다.
아기가 돌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한 달이라는 시간의 차이는 어마무시했다. 뒤집기를 할 수 있는지, 혼자 앉아있을 수 있는지, 기어 다니는지, 설 수 있는지, 걸어 다니는지 등. 개월 수마다 아기를 구별할 수 있는 지표가 여럿 있었다. 16개월과 18개월의 차이는 대단히 크진 않다. 생활도 비슷하다.
낮잠시간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오히려 낮잠 시간이 늘고 밤잠 시간이 줄었다는 것이다. 이건 아기마다 개인차가 있을 부분이라 우리 집 녀석을 보편적으로 보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다.
16개월 차에는 낮잠을 길어봐야 한 시간 반 정도를 잤다면, 지금은 2시간에서 길게는 3시간까지도 낮잠을 잔다. 낮잠시간이 오히려 늘다니. 아기의 성장 사이클에 반하는 상황이지만, 필연지사 이렇게 된 이유가 있다. 아기의 밤잠 시간이 줄었기 때문이다.
나의 어여쁜 아기는 해를 따라 움직인다. 해가 지면 졸려하고, 해가 뜨면 눈이 반짝 떠진다. 암막커튼을 마련하라는 친구의 조언이 있었다. 안타깝지만 우리 집 모든 방에는 이미 암막커튼이 있다. 언제든 제 발로 달려가 커튼을 열어젖힐 수 있는 아기에게, '해가 떠 있다는 것 = 본인의 활동시간'인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아기는 요즘 점심시간을 전후로 하여 낮잠을 잔다. 웬만해선 12시 전에 낮잠을 재우려 노력하지만 아기가 항상 협조적이지는 않기에, 때때로 오후 1시가 가깝도록 아기가 잠들지 않으면 엄마는 점점 초조해진다.
'점심밥을 먹이고 재울까? 아니야 그러면 낮잠시간이 너무 늦어져서 밤에 또 늦게 잘지도 몰라. 그치만 벌써 한시인데 낮잠 자고 밥을 먹으면 그건 점심이 아니라 점저(점심 겸 저녁)가 되잖아? 그러면 저녁 식사는 또 어떻게 해?'
아직도 아기 18개월은 햇병아리보다 노랗고 노랗게 느껴지지만, 그만치라도 머리가 굵어지면 좋은 점이 있다. 아기에게 물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든든아, 맘마 먹고 잘까? 아니면 자고 일어나서 먹을까?"
아이의 대답은 둘 중 하나다.
"맘마 머그꺼야!!(먹을거야)" 혹은 무응답.
전자의 대답이면 점심을 먹으러 가고, 후자이면 그대로 낮잠을 강행하기로 한다. 이제 막 말이 트이기 시작한 아기의 대답에 대단한 의지가 담겨있지는 않다. 하지만 엄마는 그 대답에 책임감을 조금 미루기로 한다.
"그래! 맘마 먹으러 가자! 든든이가 엄마 일으켜줘~."
아기는 쪼르르 와서 뻗은 내 손을 잡고 힘껏 당기거나, 혹은 잡은 채로 혼자 앞으로 나아간다. 그 속도에 맞춰 나도 같이 일어나 아기 방을 벗어나 부엌으로 가 점심 준비를 한다.
놀이시간
18개월. 일 년 반 만에 아기는 할 수 있는 놀잇거리가 부쩍 늘었다.
'불과 일 년 반 전만 해도'를 붙이고 회상모드에 들어가면 많은 것들이 경이로워진다. 아기침대에 똑바로 누워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빌을, 자력으로 펼 수도 없는 주먹으로 툭툭 쳐보기만 하던 녀석이. 동그라미, 세모, 네모만 가득한 흑백의 초점책을 몇 시간이고 보던 녀석이. 이제는 책장 하나도 온전히 자기의 책들로만 가득 채우고, 장난감 상자도 벌써 몇 박스는 쟁여두는 어엿한 아기가 된 것이다. 불과 일 년 반 만에! 서른 중반의 나에게 일 년 반은 출근과 퇴근을 열심히 하며, 그 사이에 친구 몇 번 만나면 지나버리는 그리 길지도 않은 시간인데. 아기의 밀도 높은 시간은 엄마의 광속 같은 시간에도 수시로 브레이크를 밟아주는 것이었다.
열개가 넘는 인형 친구들, 자석 블록, 소꿉놀이 도구, 각종 아기용 악기들, 커다란 이젤과 12색 색연필, 엄마의 전자피아노, 미니 카트, 몇 종류의 전집 책, 타요버스와 미끄럼틀. 생각나는 대로 아기의 놀잇감을 나열해 보았으나 이 중 아기가 좋아하는 순위 상위권에 있는 것은 미끄럼틀뿐이다.
요즘 아기가 제일 좋아하는 놀이는 '엄마 등 뒤에 숨는 숨바꼭질'과 '엄마 어부바하고 산책하기', '엄마 말 따라 하고 칭찬받기'이다.
엄마가 집안일을 하다 쭈그려 앉을라 치면 아기는 "등딱지!! 등딱지!!"를 외치며 빛의 속도로 달려와 엄마 등에 착 하고 달라붙는다.
"엄마 등에 착 달라붙은 요거 누구야?! 엄마 등딱지에 껌딱지 한 요 녀석 누구야?!"
하고 고개를 우로 홱 돌리면 좌로 숨고, 좌로 홱 돌리면 우로 숨는다.
내 고개가 홱 홱 돌아갈 적마다 아기는 숨넘어갈 듯 꺄르르 웃으며 좌로 우로 숨기 바쁘다. 그러다 몸을 크게 돌려 "요기 있네!!" 하고 아기를 정면으로 마주하면 아기는 "꺄아~" 소리를 지르며 저 멀리 도망가버린다. 하루 중 서너 번씩은 꼭 하게 되는 '엄마 등 뒤에 숨는 숨바꼭질'이다.
나의 체력과 날씨의 콜라보가 좋은 날은 웬만해선 산책을 가려고 한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지나가는 사람마다 손 흔들고 배꼽인사를 하던 인사성 좋은 아기였다. 최근 들어서는 먼저 손 흔들어주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마주해도 슬그머니 엄마 다리 뒤에 숨어 빼꼼히 얼굴만 내밀거나, 긴장한 얼굴로 빤히 쳐다보기만 한다. '낯섦에 대한 경계'를 배운 아기의 성장이 신기하면서도, 이 동네 미스코리아는 본인이라며 사방팔방 손 흔들던 몇 달 전의 고 녀석도 매번 그리워지는 것이다.
더불어 아기는 개미도 무서워졌다. 두어 달 전에는 둘이 길가에 쭈그려 앉아 줄지어가는 개미떼를 열심히 구경했더랬다. 그러다 개미 줄 끄트머리에서 개미집을 찾아내어 '여기가 개미네 집이야.'하고 소개해 준 날들도 많았다. 요즘은 본인의 보행로를 개미가 가로지르면 울상을 지으며 달려온다.
"개미, 개미!!"
"괜찮아. 옆으로 피해서 지나가면 돼."라는 해결책은 불만족스러운가 보다. 내가 아기를 안아 들고 개미의 횡단로를 건너 내려주어야 비로소 아기는 다시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 같은 상황을 몇 번 더 마주하고 나면 결국 아기는 "어부바, 어부바"한다. 엄마 등에 업히기만 하면 세상만사 무섭던 아기는 이제 없다. 엄마 등에 착 붙고 나면 아기는 커다란 플라타너스 가로수도 반갑고 정처 없는 비둘기 떼도 그저 반갑다. 가끔은 용기 내어 지나가는 언니, 오빠들에게 손인사도 건네어본다. 답인사가 오면 아기는 쑥스러우면서도 좋아하고, "인사해 줘서 고마워."라는 말은 내가 대신 전달해 준다.
'네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지나가는 타인과의 거리감이 이렇게나 좁아질 수 있다니.'
세상을 보는 시각은 사람마다 주관적이라 백명의 사람과 백개의 세상이 있다더니. 정말이지 아기 덕분에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되는 일들이 수도 없이 벌어질 때마다, 나는 내가 살던 대한민국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낯선 어딘가를 여행하는 기분마저 든다.
18개월 엄마의 요즘 특기는 독심술이다. 아기가 갑자기 달려와 어렴풋한 기억으로 '어물쩡 맞을 것 같은 그 단어'를 대충 말하면, 엄마는 그게 무엇인지 빠르게 파악하여 해석해 준다.
"곰도리, 슈웅~"
"아아, 곰돌이가 슈웅~ 비행기 탔어?"
아기의 표정은 굉장히 솔직하다. 아기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말한다.
"이잉, 곰도리 슈웅~"
"아아, 곰돌이가 슈웅~ 하고 미끄럼틀 탔어?"
정답일 경우 아기의 환하게 웃으며 엄마의 말을 반복한다.
"곰도리가 쑤웅~하고 미끔트 타써!"
"아휴 그랬구나. 곰돌이가 슈웅 하고 미끄럼틀 탔구나?"
아기는 '응. 맞아!'라는 말이면 마무리될 대화를 마지막 문장을 열댓 번 반복하는 것으로 끝낸다. 그렇게 아기는 하루에도 몇 단어씩, 몇 문장씩을 배워나가고 '조부모 정기방문일'마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놀라운 기쁨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우리 든든이, 어쩜 이렇게 똑똑하니. 진짜 우리 손녀 천재인가 봐."
집집마다 있다는 '우리 집 천재보유설'은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발현되고 있었다.
덧붙이자면, 엄마가 좋아하는 놀이는 '같이 베란다 의자에 앉아 창 밖 구경하기'이다. 스툴 의자에 혼자 발을 딸랑거리고 앉아있을 수 있게 된 아기는 어찌나 귀여운지. 그 모습과 바깥 풍경을 겹쳐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인데, 여기서 아기는 엄마에게 하나를 더 해준다.
"오늘은 구름이 별로 없고 햇빛이 쨍쨍하네. 저기 지나가는 자전거 보여? 파란색 옷을 입은 아저씨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고 있어! 그리고 방금 슝 하고 지나간 까치 봤어? 까치는 어떻게 울지? 맞아. 까악 까악. 지금도 저기 나뭇잎 틈에 숨어서 까악 까악 하고 운다, 그치? 참새가 짹짹 우는 소리도 들리네. 어? 저기 분홍색 옷 입은 할머니도 지나간다!"
아기는 여기저기를 가리키는 엄마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겨주고, 창 밖 배경에 대한 해설을 열심히 듣는다. 엄마는 그럴싸한 도슨트가 된 기분으로 신나서 떠들어대고 아기는 가만히 그 말들을 다 들어준다. 내가 내뱉는 말들이 나의 대단한 속마음이 아님에도 누군가가 아주 유심히 들어주고 있다는 것은 묘한 만족감을 준다. 그 만족감이 또 엄마로서의 원동력이 되고 아기가 성장하는데 생기는 호기심을 메울 수 있는 힘이 되는 게 아닐까.
저녁식사 & 목욕시간(오후 6:00~7:00)
점심과 비슷하게 저녁을 먹고 나면 목욕을 한다. 해면 스펀지를 쥐어주면 스스로 몸을 닦기도 하고, 샤워기를 틀어 쥐어주면 대충 헹구기도 한다. 자립심이 발달하고 있는 18개월 아기에게 목욕은 또 하나의 놀이를 넘어 새로운 도전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저녁 6~7시 부모의 체력은 아기의 모든 자립욕구를 받아주기엔 이미 지친 상태라 약간의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나와 남편은 진작에 바닥났을 것 같은 인내심을 어디에서든 꾸역꾸역 긁어와 아기와 목욕시간까지 마무리하는 것이다. 실로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고 자찬을 금치 않겠다. 발가벗은 채로 온 집안을 누비며 도망 다니는 아기를 쫓으며 안방에서 상체, 거실에서 하체에 로션을 겨우 발라주고 옷까지 입히고 나면, 그럴 체력은 남아있지 않으나 마음속으로는 남편과 오늘 하루를 잘 버텨낸 것에 대한 하이파이브를 수십 번도 더 하게 되는 것이다.
저녁 취침(저녁 8:00~)
세상 희로애락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는 이 밀도 있는 시간은 따로 여유를 내어 후술 하도록 하겠습니다.
글을 쓰는 것도 근력을 붙여나가는 일이라, 몇 달 만에 써보고자 하니 마음대로 되지 않는 문장과 표현이 훨씬 많아 아쉬움이 많습니다. 육아를 하는 분께도 아닌 분께도 재미있게 읽히는 글이었으면 했으나, 이제는 그러한 욕심도 다 내려놓고 누구든 한 분이라도 즐겁게 읽어주시는 분이 계시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