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6시 반]
알람이 꿈속에서 몽롱하게 들려온다.
새벽까지 수행평가 준비를 하다가 충분히 자지 못한 채 다시 시작이다.
8시 20분에 시작되는 학생회 캠페인을 위해까지 서둘러 등교해야 한다.
난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이다.
[오전 8시 10분]
출근하는 사람들과 등교하는 학생들이 뒤얽혀 숨 막히던 버스에서 오늘치 기력을 다 쓴듯하다.
버스에서 탈출한 다음 천근만근 같은 가방을 메고 학교를 오른다.
누가 학교를 이런 언덕에 세웠는지 원망스럽다.
겨우 학교에 도착해서 친구사랑 피켓을 들고 캠페인 활동을 시작한다.
다양한 학생회 활동들이 생활기록부(이하 생기부)에 기재되면 대입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학생회는 지원부터 경쟁이였다.
활동을 주도하고 준비하는 과정이 힘들지만 이런 하나하나가 쌓여 생기부 한 줄을 확보하니 다행이다.
[오전 9시 10분]
1교시가 시작됐다.
시작부터 수행평가다.
과목마다 1학기 동안 적으면 2개, 많으면 4개까지 수행평가를 치러야 한다.
과정평가라는 허울 좋은 구실을 내세워 우리들을 죽이려는 속셈이 분명하다.
이번 학기에 배우는 과목은 총 9과목이다.
평균적으로 과목당 수행평가를 3개씩 치른다고 생각하면 한 학기에 총 27번 수행평가를 치러야 한다.
여기에 학기당 2번의 모의고사와 2번의 정기고사가 더해진다.
수행평가와 정기고사 성적은 모두 내신을 결정하는 요소들이다.
내신은 한번 어그러지면 복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매 순간이 긴장이다.
거의 매일 시험을 치르거나, 또는 준비하는 생활의 연속이다.
과목마다, 평가마다 평가 요소와 방식이 모두 다르다.
한 순간이라도 긴장을 늦추면 정보를 놓칠까 봐 늘 긴장의 연속이다.
어느 순간도 편하지 않다.
[오후 1시]
점심시간이 시작되었다.
이 시간이라고 온전히 쉴 수 없다.
내가 향하는 건 급식실이 아닌 과학실이다.
과학책 함께 읽는 프로그램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그나마 우리 학교는 프로그램이 다양해서 선택의 폭이 넓은 편이다.
학교마다 운영되는 활동이 다르고, 해마다 교사진에 따라 기존에 있던 프로그램도 없어지거나 축소되기도 한다.
대입은 나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운에 의해 결정되는 복불복 게임 같다.
금쪽같은 점심시간 30분을 책을 읽고 남은 시간에 급식을 먹고 양치하고 5교시를 준비한다.
[오후 4시 50분]
점심 먹고 지루한 3시간의 수업을 버티고 종례 시간이다.
전달 사항이 쏟아진다.
고교학점제 때문에 2학년 선택 과목을 골라야 하는데 처음 듣는 과목들이 낯설기만 하다.
지금의 선택이 내 입시에 큰 영향을 미칠까 봐 어떤 것 하나도 쉽게 결정할 수가 없다.
모든 게 버겁다.
[오후 5시 20분]
학원에 가기 전 편의점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는다.
친구들과 수다 떨며 편하게 밥 먹는 이 시간이 가장 힐링 타임이다.
매일 먹는 편의점 음식이 조금 물리기도 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이곳을 벗어나기 힘들다.
고카페인드링크 음료를 하나 챙겨서 학원으로 올라간다.
아직 집에 가기까지 5시간이 부족하다.
[오후 10시 00분]
집을 나선 지 14시간 만에 귀가다.
씻고 침대에 누우니 이제야 숨이 쉬어지는 기분이다.
종일 보지 못한 카톡방을 살피고, 분주히 손가락을 움직여 친구들과의 대화에 끼어든다.
이때, 방문이 열린다.
엄마는 차마 입으로 뱉어내지 못하는 잔소리를 눈으로 발사한다.
'또 핸드폰이냐'는 글자가 눈동자에 새겨져 있다.
[오후 10시 30분]
피곤하지만 잘 수 없다.
기말고사가 일주일 앞이다.
고등학교 첫 내신이 결정되는 시험이다.
앞서 중간고사에서 처음 받아보는 점수를 받았기에 더 열심히 해야 한다.
하지만 공부해야 할 것도 너무 많고 중학교와 달라 갑자기 어려워진 내용에 공부 방법도 막막하다.
중학교까지 공부 잘한다는 소리 들으며 컸는데 고등학교 와서 겪은 좌절이 너무 크다.
교과서에 파묻히는 동안 내 십 대는 삭아진다.
미래가 걸린 싸움이기에 현재를 담보로 걸고 모든 것을 올인한다.
모두를 순서대로 줄 세워야 하는 경쟁이기에 남보다 못하면 도태된다.
한번 밀리면 다시 올라서기 어렵기에 압박감이 온몸을 옭아맨다.
과연, 나는 이 겨루기에서 버텨 바라는 바를 얻을 수 있을까?
불안을 떨쳐내고 다시 집중해 본다.
그래야 한다.
기말고사가 일주일 앞이다.
부모 세대가 다니던 고등학교 때와 지금은 천지차이입니다.
수능 하나만 잘 보면 되던 90년대와 질적으로 다릅니다.
한번 실수하면 큰 데미지를 입는 내신 + 하루에 두어 개씩 한꺼번에 쏟아지는 수행평가 + 생활기록부를 채우기 위한 각종 학교 프로그램 참여 + 동아리 활동 + 학생 자치회 활동 + 스스로 준비해야 하는 과목별 심화주제발표 + 최저등급을 맞추기 위한 수능 준비까지
어느 것 하나 소홀할 수 없기에 사력을 다해 하루를 살아냅니다.
젊은 생기가 대입으로 인해 시들어가는 걸 지켜봅니다.
그럼에도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그들을 채비합니다.
그러다 주말 사이 수능 킬러문제를 두고 시끌시끌한 뉴스를 봅니다.
누구를 위한 논쟁인지 궁금합니다.
혼란의 주인공들은 목소리가 없습니다.
그저 공부를 합니다.
오늘 그들을 바라보다 생각했습니다.
난 일찍 태어나 다행이다.
너희처럼 살 자신이 없구나.
대견한 아이들아, 오늘을 잘 버텨주렴.
시들지 말고 활짝 피어나 주렴.
할 수 있는게 고작 이정도 뿐이라 허무한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