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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해지리 Jun 16. 2023

그놈의 차량번호가 각인되었습니다.

 


오전 7시 10분

눈이 뜨고 시간을 확인하고 잠시 멈춤. 

늦었다


앞서 알람을 무의식으로 끈 모양입니다. 

밥을 새로 해서 유부초밥을 하려던 계획을 실천하기 어렵다는 회로를 돌리며 냉장고를 열었는데 엊그제 먹고 남겨둔 삼계탕이 까꿍 합니다. 

뼈를 모두 발라서 넣어둔 그날의 나를 칭찬하며 재빨리 즉석밥을 렌즈에 돌려 닭죽으로 변신시킵니다. 

손으로는 주걱을 휘젓고 입으로는 남매를 깨우며 분주히 준비해서 겨우 출근과 등교 준비를 마쳤습니다. 

 


오전 8시 15분

지하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아빠와 함께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신나게 빠빠이를 날리고 뛰듯 제 차로 달려가던 그때 그놈의 차를 발견했습니다. 

주차 공간이 아닌 통로에 주차된 그 차는 벽에 바짝 붙이지도 않고 자리를 잡아서 도통 나갈 각도가 나오지 않더군요. 

전 운전경력 17년에 무사고 운전으로 주행도 주차도 전혀 불편을 겪지 않는 운전자입니다. 

김여사라는 말이 거슬리는 여자 사람으로 제 실력 부족으로 못나는 상황이 아니었음을 밝히는 바입니다. 

지나가던 8층 아저씨도 '이건 못 빼요. 빨리 전화하세요.'라고 조언하고 퇴장하셨습니다. 


했습니다, 전화

안 받았습니다, 그놈이

계속했습니다, 10분여를

이때부터 슬슬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전 고등학교 담임교사입니다.

아이들에게 지각하지 말고 아침에 5분 일찍 오라고 훈화하는 사람입니다.

지각하면 생활기록부에 기재되고 불이익될 수 있으니 조심하자 아침마다 잔소리를 합니다.

그런데 제가 늦게 생겼습니다.

초조함과 짜증의 콜라보로 땀이 나기 시작했는데 이놈의 08★★ 차주는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끙끙대다가 관리사무소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나타나라는 08★★ 차주는 감감소식인데 직원분은 1분도 안 돼 뛰어나와주셨어요. 

어찌나 고맙던지요 

빠르게 차량 조회를 했는데 아파트에 등록되지 않은 차량이라 차주 파악이 안 됩니다.

방송을 해서 차주를 찾아보겠다며 다시 돌아가셨습니다. 


시간은 이미 20분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제 차를 둘러싸고 있는 다른 차를 빼보기로 합니다.

아파트가 오래된 구축이라 주차 라인에 스토퍼가 없습니다.

차 엉덩이를 마주하고 있는 차를 빼면 후진으로 라도 나갈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뜻대로 안 되네요.

이럴 때 쓰라고 엎친데 덮치고흉년에 윤달 온다 말을 있는 겁니다. 

전화 통화는 한번에 되었는데 뒷차는 배터리가 나가서 어제부터 운행을 못하고 계신다네요.


택시를 부를까 싶다가도 혹시나  08★★ 차주가 나올 수도 있다는 희망고문에 오도 가도 못했습니다. 

오늘 저녁은 야간자율학습 감독이 있습니다. 

밤 9시에 끝나고 주말에 채점해야 하는 수행평가를 잔뜩 챙겨 와야 해서 차가 필요했습니다. 

종잡지 못하고 미쳐가고 있을 때 아파트에 방송이 나갔습니다. 


102동 지하 1층 주차장에 주차하신 08★★ 차량 이동 주차 해주시기 바랍니다.

 


오전 8시 50분

08★★ 차주가 나타났습니다.

뛰어오지도 않고 그냥 잰걸음으로 나오는데 정말 열불이 나더군요.

그리고는 저와 방송 마치고 다시 나와주신 관리사무소 직원분을 지나쳐 바로 본인 차로 가 문을 열었습니다. 

'아구 미아....ㄴ'이라고 얼버무리고더니 차문을 닫고 그대로 차를 출발시켰습니다.

'아니 사과는 하고 가야죠'라고 차뒷꽁지에 악다구니를 쳤지만 이미 그놈의 차는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분노에 차서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관리실 직원분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저도 바로 시동 걸어 출발했습니다.

급하게 운전할까 봐 걱정이 되신 직원분은 '조심조심, 살살, 안전히 출근하세요'라고 다독여주셨어요. 


그렇게 주차장을 빠져나가니 08★★가 멀리 못 가고 좌회전 깜빡이를 켜고 아파트 앞 신호에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저랑 가는 방향이 같은가 봅니다.

그렇게 의도하지 않게 1km가량을 같은 방향으로 뒤쫓아갔습니다.


제가 바짝 쫓아가면 긴장하려나?
클락션이라도 눌러서 시위라도 해볼까?



그리고 다시 한번 신호 대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  08★★ 옆 라인이 비어있습니다.


나란히 차를 세워 창문 열고 항의를 해~ 말어?
정식으로 사과하라고 바락바락 성질을 내?


모두 상상으로 그치고 저는 직진을,  08★★은 좌회전을 하며 헤어졌습니다.



오전 9시 10분

결국 1교시 수업이 시작되는 종소리를 들으며 주차를 했어요.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띠로리로~띠로리로리'로 들린 건 제 마음의 투영이었나 봅니다.

교무실에 도착해 부장님께 출근했음을 보고하고 (평소는 안 하죠) 조회를 대신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고개 숙여 인사했습니다.


출근만 했을 뿐인데 늙어버린 듯한 기분으로 자리에 앉았습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아이스카페라떼가 놓여있었어요.

짝꿍의 선물이었어요. 



지각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꿀꿀한 날, 짝꿍의 센스로 다시 웃어봅니다. 





08★★

숫자가 잊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미안하다는 인사말조차 남길 줄 모르는   08★★ 차주는 오늘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요? 

저는 덕분에 잠시 끔찍했으나, 글감 하나를 건졌습니다. 






(제목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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